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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사랑하는 소녀. 과야마스 해안도로 새벽 라이딩을 제안해 왔다.
▲ 자스민 자전거를 사랑하는 소녀. 과야마스 해안도로 새벽 라이딩을 제안해 왔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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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왜요?"
"아니요, 그냥."

의심 속에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참기로 했다. 일단 믿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다가 온 사람에게 당연한 답례는 신뢰일 테니. 자스민은 우물쭈물하는 내가 싱거웠는지 살짝 웃음으로 넘긴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뜬금없는 초대에 뒷배경이 될지 모를 음모론을 마음에서 좀처럼 털어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거나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빠져나오리라 생각하고 결국 아무말도 못한 채 묵묵히 그녀의 발자국을 뒤따랐다.

그녀의 집은 언덕배기 위에 위치해 있었다. 멀찍이 보기에는 다행히 부유한 동네라 한 걸음 내딛을수록 마음이 놓였다. 최소한 폐는 안 끼치겠구나 싶은 것이다. 중력의 법칙 속에 허우적대며 거의 60°가 기울어진 경사를 자전거를 밀어 올라가야 하는 길은 힘들었지만 별에 가까이 다가가는 낭만과 땀을 씻겨주는 밤바람에 힘쓰느라 쭈그러진 얼굴을 환하게 펼 수 있었다.

간호사를 꿈꾸는 그녀 역시 이곳에서 어둠에 반짝이는 별을 보며 자신의 꿈이 영글어 갔으리라. 그녀는 걸으면서도 힘겹게 영어를 쥐어짜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한 마디 던질 때마다 자못 심각해지는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녀의 집에 다다랐을 때 사실 조금 놀랐다. 주위 집들에 비해 다소 허름해 보이는 곳이라 이런 집에 초대를 했나 싶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 잘 살기에 초대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스민의 집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내게는 그것이 큰 상관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 주눅들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좁은 공간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장신구들과 벽에 걸린 오래된 낡은 사진들이 보였다. 부모님과 두 형제는 일 때문에 모두 에르모시요에 있었다.

자스민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이모, 왼쪽이 남자친구. 넉넉치 못한 형편에도 초대해 준 것에 대해 감사.
▲ 가족 자스민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이모, 왼쪽이 남자친구. 넉넉치 못한 형편에도 초대해 준 것에 대해 감사.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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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모랑 둘이 살아요."

밤에 도착해 단 둘이 있었다. 어색한 건 둘째 치고 뭐랄까 이 느낌.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사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갑자기 마리화나를 권한다든지 누군가 갑자기 들어와 무슨 해코지가 있을까 싶어 속으로 조금 긴장했던 것이다. 물론 거실에 있었지만 남녀 단 둘이 있는데 오히려 내 쪽에서 경계할 줄은 몰랐다. 강도 학습 효과가 크긴 컸나 보다. 마냥 꼼지락 거릴 수만 없어 대화의 화제를 찾기 위해 간단히 집을 둘러보았지만 그마저도 3분이면 족한 것이었다.

"오, 왔어요? 반가워요."

잠시 뒤 다행스럽게도 이 맹한 침묵을 메워 줄 자스민의 이모가 도착했다. 미리 내 소식을 들었던지 반갑게 맞아준다. 어머니라 해도 믿을만한 분위기의 이모는 캐나다 있다 와서 그런지 자스민보다는 영어가 훨씬 나았다.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그녀는 바삐 손을 움직이더니 어느 새 뚝딱 식사를 내왔다. 속이 좋지 않았지만 손님에게 대접한 저녁을 거절할 수가 없어 맛만 보았다.

힘들다. 혈변의 원인은 평소 부적절한 식습관과 새벽 라이딩에 의한 과로?
▲ 아... 힘들다. 혈변의 원인은 평소 부적절한 식습관과 새벽 라이딩에 의한 과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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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민의 집은 언덕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옆길로 얼마간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녀의 집은 언덕 도로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달동네인 것이다. 바로 옆 동네가 부유층인데 반해 마치 얼기설기 엮어놓은 듯한 대문짝이며 샤워실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화장실, 그리고 달랑 가스렌지와 냉장고가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엌은 적잖게 나를 당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초대해줬구나.'
당황은 곧 사려 깊은 그녀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친절을 베푸는 것이 가진 자의 전유물만은 아니리라. 허리를 숙여 낮은 곳에서 눈높이를 맞춰줄 줄 아는 생각의 높이가 높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 샤워를 할 수 없기에 물을 데워 빈 페인트 통에 쏟아 부어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페인트 한 통에 담긴 물로 샤워를 해야했다. 하지만 별 무리없이 샤워를 끝마칠 수 있었다. 컵으로 몸 여기저기에 물을 뿌리고 비누칠하고 다시 컵으로 물을 뿌리고. 결국 페인트 한 통으로 머리감고 몸 구석구석 다 닦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해서 물을 아낄 수 있는 게 조금 불편할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싶다. 직접 해 보니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다.

"종성, 괜찮다면 내일 새벽에 자전거 타고 과야마스 해안 일주 할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자전거를 좋아한다는 그녀다운 제안이었다. 새벽 라이딩이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일은 상큼한 새벽바람을 가르며 과야마스를 둘러보겠구나'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자스민과 동호회 친구 프란시스코. 라이딩 후에도 쌩쌩한 활력 넘치는 친구들.
▲ 지치지도 않나. 자스민과 동호회 친구 프란시스코. 라이딩 후에도 쌩쌩한 활력 넘치는 친구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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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반. 이미 자스민과 마리(이모)는 일어나 새벽준비에 분주했다. 전날 고생을 해서 천근이 되는 몸을 일으키려니 힘들다. 졸린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와 보니 자스민의 자전거 동호회 친구(하지만 40대로 보이는)인 프란시스코도 와 있었다.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으나 사람이 신의를 저버리면 다음 관계가 피곤해진다.

꼴찌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모처럼 6시 이전 기상으로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꿈이고픈 현실로 인지하는 몽롱함을 씻겨내려 찬물로 냅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씻고 아침도 거른 채 자전거 복장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6시 반. 이른 시간인데도 이모는 직장에 출근하고 나와 자스민은 프란시스코의 차로 일단 해안까지 가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뷰티풀 하지 않아?"

자스민과 프란시스코 두 사람은 연신 뷰티풀을 연발하며 나에게도 그 감정을 강요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과야마스의 대표적인 하이킹 코스인 산 카를로스 해안은 지나치게 평범할 정도로 사실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토록 감동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차이일까?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는 명쾌한 진리가 다시 한 번 폐부를 후벼판다.

잠을 푹 자지 못해 몸도 피곤하고 머리가 띵해 멀찍이 앞서간 다음 보조를 맞추려고 양해를 구하고 가장 먼저 출발했다. 하지만 10분이나 뒤에 출발한 프란시스코에게 이내 따라잡혔다. 게다가 자스민 역시 오히려 내 속도에 보조를 맞춰주며 여유롭게 타고 있었다.

언덕에선 얼굴이 상기되고 피곤에 무리를 더한 허벅지에 극렬한 고통이 따랐지만 자스민과 프란시스코는 소풍 나온 듯 내내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나를 보며 웃는 표정에 잠시 숨을 멈추고 따라 웃어줘야 되는 분위기였다. 헉헉 거리며 제일 뒤처진 채 달렸지만 그래도 바닷바람에 씻긴 얼굴은 어느 새 활짝 펴져 너른 대양을 가슴으로 안고 있었다.

그렇게 쌀쌀한 날씨를 마주한 채 과야마스 외곽 해안도로를 타고 10km 정도 달렸다. 신선한 바람을 가뿐하게 받아들이며 달린 시간은 별 거 아닌 듯했지만 새벽주행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건 억지춘향으로 올빼미형인 나에게 아침형 인간을 주문한 신체 리듬을 거스르는 피학적 발상이었다.

사실은 춥고 피곤해 솜이불이 그리웠던 때.
▲ 바닷바람을 맞으며 라이딩 하는 기분. 사실은 춥고 피곤해 솜이불이 그리웠던 때.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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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을 마치고 하도 피곤해 돌아온 뒤 10시에 잤는데 깨어보니 벌써 오후 2시. 간호사를 꿈꾸는 자스민은 병원 실습을 나가고 없었다. 가족들이 열쇠를 내게 맡기고 떠나 집에는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일단 배가 고파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나와 주변 마트 안 중국 음식점에서 닭, 돼지고기, 볶음밥으로 포장된 도시락을 42페소에 사 먹었다. 오늘만큼은 집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백수버전으로 있어야 할 만큼 새벽주행의 후유증이 작지가 않았다.

식사를 한 뒤 포만해진 배를 두드리며 볼 일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화장실 변기마저 고장인지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거름도 줄 겸 담벼락에 붙어있는 텃밭 가장 뒤쪽자리 넝쿨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도둑처럼 고양이 걸음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자스민의 집이 다른 집보다 아래 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최대한 넝쿨 사이로 몸을 은폐시켜야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두려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조심스레 볼 일을 보기 위한 사전 준비를 마쳤다.

난 오직 탱탱한 살집을 노리며 수풀 사이로 날아드는 모기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이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편안히 느끼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그런데 뒤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배탈 협주곡도 아닌데 뭔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나는 것이다. 고개를 숙여 다리 사이의 세상을 거꾸로 바라본 나는 그만 가슴을 철렁이며 식겁하고 말았다. 공포괴담에서나 나오는 뚝뚝 떨어지는 선홍색 피. 혈변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질어질 해왔다. 너무 놀라 다시 빼꼼히 바라보아도 모락모락 김이 나는 변 위에 빨갛게 흐르는 피에 그만 그대로 응가 위에 주저앉을 뻔했다.

입맛을 돋우고 체력을 증진시키는 킹왕짱 서민 음식 뽀요(Pollo). 혈변 이후 자주 애용, 그 후 뒤끝이 없는 음식이다.
▲ 치킨 입맛을 돋우고 체력을 증진시키는 킹왕짱 서민 음식 뽀요(Pollo). 혈변 이후 자주 애용, 그 후 뒤끝이 없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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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가뜩이나 캔서 포비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탄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 나인데 이젠 피 묻은 응가라니. 단순히 변에 피가 묻은 것이 아니라 아예 피가 따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죽을병 아닌가 공포가 엄습하고 자전거 여행을 이대로 중단해야 하나라는 심각한 위기의식까지 생겼다. 착잡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두 번이나 뒤를 닦고서야 겨우 피흘림이 잠잠해졌다. 정말이지 고개를 숙여 뒤에서 피가 나오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은 닭목을 잘랐을 때 퍼덕거리는 그 끔찍한 만큼이나 싫은 광경이다. 찝찝한 기분을 애써 삭힌 채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새벽에 무리한 주행 때문인지 아님 술, 담배를 멀리하고서도 평소 몸을 돌보지 않은 식습관 때문인지 용무 중 빨강의 공포를 마주한 불길함은 지옥의 모든 공포가 머리 위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충격과 혼란스러움을 잠재우는 건 역시 그대로 잠을 자는 것.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장면이 리화인드 되는 걸 억지로 털어내려 애썼다. '도대체 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검은 세상에 또렷이 새겨진 내 안에 음성.

"평소에 마음을 곱게 쓰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벌 받은 거지 뭐."

이 길 위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찾아온다.
▲ 길 이 길 위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찾아온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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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자스민과 그녀의 남자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에 엉덩이의 느낌은 다행히 괜찮았다. 하지만 더 괜찮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응가를 가려놓은 넝쿨잎들이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지 않는 것. 뭐 인간의 본연적인 배설에의 욕구가 들키면 부끄럽기보다도 혹, 자스민 향기처럼 싱그러운 자스민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가 염려되기에.

'혹시 내 혼신을 다한 고통의 흔적을 보더라도 모른 척 해 줘 자스민. 깊숙한 곳에 일을 봐서 들킬 것 같진 않지만 말야. 참, 남쪽 비탈면이라 냄새는 아마 아랫동네로 향할꺼야.'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멕시코, #문종성, #비전노마드,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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