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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익이 어두워지고 있는 강의 먼 곳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형님, 혁명의 길은 까마득한데 고향 생각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는군요.”
“나도 그렇다네.”
“아내의 둥근 얼굴이 밤마다 떠오릅니다.”
“자네도 그런가?”
“형님도 그런가 보지요?”
“둘 다 그런 모양이군.”

“형님 저는 아내만 떠오르는 게 아닙니다.”
“나도 그렇다네. 딸애 얼굴도 떠올라.”
“저는 연애하던 처녀가 떠오릅니다.”
“아내보다 예뻤겠구만.”
“아내는 모릅니다.”
“예쁘다는 걸 모른다는 건가?”
“그 여자가 있는 걸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걸 알게 하는 바보도 있나?”
“형님은 없습니까?”

신규식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조금 사이를 두고 말했다.
“내 아내에게 얘기 안 할 거지?”
“그런 걸 묻는 바보도 있습니까?”

두 사람은 큰 소리로 함께 웃었다. 그들은 강가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서로의 술 냄새를 맡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강 안개가 두꺼워져 있었다.

백주원

정동에 손탁 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은 고종이 아관파천 때 시중을 들었던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 손탁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호텔은 벽돌로 지은 2층 신식 건물이었다. 2층은 귀빈실, 아래층에는 일반실과 커피숍이 있었다. 김태수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일로 심경이 복잡한 데다 오윤정에 대한 마음까지 겹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잡지를 뒤적이다가 커피가 머리를 맑게 하는 서양 기호음료라는 글을 읽고는 일부러 나와 본 것이었다.

그는 조선 건축을 비롯한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지금쯤 호남 지방을 여행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조선의 풍류 시인들이 노닐던 정자들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남도 판소리에도 식견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명창 한 사람을 찾아 마주 앉아 그의 표정을 보며 소리를 감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오윤정 때문에 당최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만나 자기의 마음을 전하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성싶었다. 그런데 딱하게도 그에게는 타고 갈 말도 없었다.

손탁 호텔은 구한말 외국인들이 애용하던 곳이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종군 기자로 왔다가 머문 적도 있었고, 무슨 목적으로 온지는 몰라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엘리스가 투숙한 적도 있다고 했다.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이 호텔에 가끔 들락거렸다고 했다. 손탁호텔은 훗날 이화학당에 팔릴 때까지 저명인사들의 만남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김태수는 커피에 입을 대 보았다. 난생 처음 맛 본 커피였지만 그는 금세 맛을 알아차렸다. 그는 예민한 미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였다. 커피는 잘 그을려진 숭늉과 비슷한 것 같았다. 묽게 만들어 마시면 영락없이 서양 숭늉일 터였다. 그러나 숭늉에는 없는 특이한 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농도를 진하게 해서 마실 경우 각성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은 각성 효과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었다. 그는 반쯤 남은 커피에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설탕과 크림을 넣어 마셔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마실 바에야 조선 식혜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모아 잡은 두 손등에 턱을 받친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동 거리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유달리 많은 것 같았다. 그때 일본군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호텔 앞에 멎는 게 보였다. 잇따라 또 한대의 차가 멎었다. 앞 차에서 운전병이 내려 부리나케 반대쪽으로 가 문을 열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군인 복장의 일본인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운전병은 한 발을 힘차게 들었다가 땅에 붙이며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했다. 김태수는 아주 높은 직급이라고 생각했다. 뒤차에서도 군인 둘이 내렸다. 먼저 내린 고관의 참모거나 부관인 듯싶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내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과 하이힐 구두를 신고 있었다. 김태수는 내면으로 깊이 놀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어 가방을 쥔 손으로 옮겨 잡기 전부터, 그는 이미 여자가 오윤정임을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호텔 측에서 두 사람이 화급히 나와 일본 고관을 영접했다. 아마도 호텔 사장과 지배인일 거라고 김태수는 생각했다. 고관은 뒤차에서 내린 세 사람과 함께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고관은 차를 주문한 후 눈을 들어 커피숍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윤정도 고관을 따라 실내를 둘러보다가 김태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미세한 당혹감을 김태수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각기 시선을 거둬들였다.

일본 고관이 반쯤 마신 찻잔을 놓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오윤정이 가방에서 서류 같은 것을 내어 고관 앞으로 펼쳤다. 두 남자 군인은 긴장한 채로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반해, 오윤정의 태도는 조금도 스스럼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서류를 검토한 일본 고관은 오윤정에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눈을 한 번 올려 뜨는 것으로 사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김태수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혼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고관과 같은 차를 타고 와서 스스럼없이 합석하고 있는 저 여자는 대관절 무어란 말인가? 그는 슬그머니 눈을 돌려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일본 고관이 뭐라고 하자, 같이 있던 두 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상관에게 경례를 붙이더니 커피숍에서 나갔다.

그러자 오윤정과 고관은 머리를 가까이 하고 함께 서류를 검토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찻잔에 입을 대면서 눈을 들어 흘깃 김태수 쪽을 보았다. 다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김태수는 목례를 보냈다. 그녀는 다소곳이 눈길을 내리깔았다.

얼마 후 일본 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윤정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출구로 나가고 있었다. 오윤정이 일본 고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자 고관이 먼저 호텔 밖 쪽으로 나갔다. 그녀는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김태수에게 걸어왔다. 김태수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선글라스와 가방이 태수의 눈 옆에서 출렁거렸다.

“이 달 말일 오후에 오윤정으로 나오세요.”
그녀는 이 말만을 남기고 기민한 동작으로 커피숍에서 나갔다. 김태수는 바로 눈을 들어 달력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오늘은 분명히 5월 초하루, 1일이었다. 그는 지배인을 불렀다.

“방금 왔다 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카시이 경무총장 각하이십니다.”
경무총장이라면 헌병사령관을 겸하는 총독부 제2 실권자였다.

김인용은 아들 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작년에 학교를 마치자마자 혼인하기를 기대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그는 못내 아쉬웠다. 그는 큰아들에게는 아무런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설령 그 녀석이 먼저 아들을 낳는다 해도 기대할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아비처럼 예수나 믿으며 후일봉사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큰아들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선을 그어 놓고 있었다. 그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지원하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김인용의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어 있었다. 그는 한시라도 어서 손자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손자가 나오기 전에 족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손자가 나오면 족보에 정식으로 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일이 김 노인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족보도 태수에게 일임한 일이었다. 자기야 곧 죽을 테니까 그 일을 아들이 관장하는 것이 훗날을 위해서도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아들이 들어왔다는 전갈이 왔다. 그는 아들을 불렀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말하는 소설입니다.



태그:#손탁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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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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