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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덮힌 건봉사 건봉사에 있는 벗나무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심어졌다. 사명당이 승병을 훈련시켜 왜군을 물리쳤던 건봉사에 일본인들은 왜 벗나무를 심었을까?
▲ 눈에 덮힌 건봉사 건봉사에 있는 벗나무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심어졌다. 사명당이 승병을 훈련시켜 왜군을 물리쳤던 건봉사에 일본인들은 왜 벗나무를 심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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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나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몇 날의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그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자책감이다. 왜 그랬을까? 궁금증이 염주알처럼 구른다.

오래된 절이나 빈 절터를 둘러보면서 그저 특이하고 오래된 것만 찾는 사람들은 모두 도굴꾼의 심성을 지녔나. 건봉사에서도 남들의 말에 끌려 일주문 십바라밀 석주만 좋은 거구나 하고 둘러봤다.

그 자리에 머물렀던 이나, 찾아들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헤아리지 못하고 어느 절에는 ‘무엇이 오래 되고 유명하다’ 하면 떼를 지어 몰려 다닌다. 한 때 어느 절에는 불법보다 개가 더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지. 달을 가리키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을 이런 때 써야 할까.

건봉사 불이문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세워졌다.왜적의 침략을 물리친 승병의 발상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80여년전에 신축된 것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을까?
▲ 건봉사 불이문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세워졌다.왜적의 침략을 물리친 승병의 발상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80여년전에 신축된 것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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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는 강원도의 북쪽 끝, 서울의 동북쪽 끝이라서 사람들의 관심밖에 밀려나 있었나. 그건 아닐게다. 거리로 따지자면 해인사 통도사가 더 멀지 않은가. 석가모니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고 또 친견할 수 있는 곳인데, 아마도 우리 마음이 멀어져 있었던 탓일게다.

‘휴전선 밑’, ‘북쪽’ 그렇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마음을 멀게 했다. 북쪽이라고만 해도 우리 마음에서 살아 꿈틀대는 레드 컴플렉스. 건봉사도 군사정권이 만들어 놓은 수렁에 빠져있었고,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들 마음이 스스로 거부해 온 것 일게다.

16년 전 첫 참배길에 총을 든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 했고 철조망 대문을 열고 들어간 절에서 육중한 덩치의 금고속 사리를 친견했었다. 다시 찾은 이번에도 절 초입 비탈길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서 있다.

건봉사는 아직도 전란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건봉사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멀게했다. 일제의 강점, 민족의 분단과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다. 그 전란의 한 가운데서 1500년 역사를 태워 없애고도 무엇이 참된 것인지 몰라 불이문과 석주를 붙잡고 그것이 건봉사의 전부인양 한다. 나도 그랬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건봉사 주차장의 벗나무 일제시대에 심어진 벗나무가 사임당 기념관앞 주차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 건봉사 주차장의 벗나무 일제시대에 심어진 벗나무가 사임당 기념관앞 주차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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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형 현강문화연구소장의 글이 이른 새벽 범종 소리처럼 가슴을 친다.

“스님! 건봉사 불이문(不二門)의 진짜 의미를 아시나요?”
“그야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고,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해탈의 불국토를 상징하지요.”
“스님! 아닙니다! 건봉사의 불이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비수를 감춘 치욕의 상징입니다. 조선불교의 암울한 식민지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타루문(墮淚門)입니다!”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이 공포되면서 일제의 치밀한 조선불교 무력화가 진행된다. 조선 4대가람이요, 역사를 되짚어 봐도 그들에게는 가시같은 존재인 건봉사를 왜색불교로 덧칠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주지의 임명, 일본풍의 절집, 벚나무를 심고 전각의 석축과 교량의 난간석을 모두 일본식으로 뒤바꾼다. 만일염불회의 성지에 등공탑을 세우고(1915), 한국 불교에서는 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십바라밀석주를 세우고 낙서암 지역에 일(日)자형 연못을 팠다.

사임당 기념관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친 사임당. 일본이 약탈해간 통도사 사리를 이곳 건봉사에 안치했다.
▲ 사임당 기념관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친 사임당. 일본이 약탈해간 통도사 사리를 이곳 건봉사에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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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두 개의 석주에 새겨진 여섯 자의 진언과 용사활지(龍蛇活地), 방생장계(放生場界)의 글은 그 속내가 “조선은 죽었다!”는 뜻 외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단다.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치고 일본에 건너가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사명당의 기적비를 철저하게 파괴했다고 글을 맺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주문이 전쟁의 참화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또 기둥이 네 개로 특이하다고 추켜 세우고, 십바라밀석주도 보물인양 한다.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 사리가 있는 곳에서 왜국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붙잡고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눈이 녹고 나무에 새움이 틀 때 만사 제껴 두고 건봉사를 찾으리라. 돌덩어리 하나 깨진 기왓장을 들추고라도 부처의 진신을 찾을 것이다. 1500년을 이어온 불교의 근본 진리와 이 땅을 침범한 왜를 물리친 승병들, 수행으로 생사리가 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하면서 찾고자 했던 진리를 불러낼 것이다.

왜색 불교의 덧칠을 긁어내고, 누가 민족을 갈라놓고 총부리를 겨누게 했는지 알아내리라. 또 자욱한 포연속에서 숨져간 수 많은 영혼들의 한 맺힌 절규를 들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석가모니 부처가 2550여년이란 시간을 관통하여 건봉사에 머무는 이유를 들으리라.

봉서루 금강산 건봉사 현판이 걸려있다. 이문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만일염불원이 있다.
왼쪽에 석주의 윗부분이 보인다.
▲ 봉서루 금강산 건봉사 현판이 걸려있다. 이문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만일염불원이 있다. 왼쪽에 석주의 윗부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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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최원석 기자는 자전거포(http://www.bike1004.com)를 운영하며 강원 영동지방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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