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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나라가 영어 교육문제로 시끌벅적합니다. 이곳 캐나다로 이민 온 지도 이제 7년을 꼬박채워 갑니다. 이민 7년차, 8년차…. 이런 표현으로 신출내기 이민자와 고참 이민자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으니 아마 이것도 우리가 학교 다닐 적에 표현한 'ROTC 1년차, 2년차'하던 군사문화의 잔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새로 정부가 바뀌고 교육정책도 바뀌는 모양입니다. 특히 영어교육문제로 갑론을박 하고 있는 모습에서 영어를 전공한 연유로 이곳에 이민 온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영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곳 외국학교가 싫어 한국행을 감행하여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말많던 수능등급제를 거쳐 이제 대입 발표를 앞둔 큰아이가 1여년만에 이곳 캐나다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습니다. 생소했던 이곳 중·고교과정을 다 마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서 '역유학'을 한 셈이지요.

친구 한 명 만들지 못한, 외톨이였던 아이는 이민 온 이후로 영어가 전혀 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인수위 사람들의 방식으로 된 전부 영어로만 학습받은 아이가 영어로 말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개인취향인 듯 합니다. 즉, 수줍은 성격의 내성적인 아이였던 셈이죠. 이민오기 전 여러 '자칭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지만 이곳에서 산 경험으로는 환경을 바꾼다고 영어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다행히 외국어영역에서 1등급을 받은 아이는 체면은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캐나다에서 이민자를 위한 영어학습 프로그램(ESL)을 몇 년간 했었었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돌아온 아이는 아빠인 제가 무조건 글을 베껴 쓰게한 것이 영어성적의 밑천이 되었다고 실토하더군요.

2010년부터 한국 고등학교에선 '영어'과목은 '영어'로만 수업한다고 합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제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1학년에 재학할 때입니다. 부산이 고향인 관계로 학교 인근에 자취방을 구하고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던 때였습니다. 학교 앞 식당이라 술안주도 겸해서 팔던 그런 곳에서 밥을 대먹고 있었죠. 어느 저녁에 낯익은 교수님 몇 분이 퇴근후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뒷방에서 그집 꼬맹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던 터라 홀안 취객들의 소리가 잘 들렸습니다.

영문학을 가르치던 반백의 그 교수님이 언성을 높이더군요.

"이제 수업을 전부 영어로만 하라는데 난 못해! 정 그렇다면 나갈 수밖에…."
그 교수님에게서 그 어려운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한 학기 동안 배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납니다. 당연하죠. 일제시대에 영문학을 전공한 그 교수님에게 영어원강을 하라니 그 교수님은 황당했을 겁니다. 아마 지금의 고교 영어선생들도 서로 모여 저녁 퇴근 시간에 소주잔 기울이며 똑 같은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를 배운 인연으로 여러 곡절을 거쳐 이곳에 살고 있지만 이제 영어에 대한 교육으로 인한 불협화음이 들리면 저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왜? 우리는 영어에 저렇게 집착할까? 이곳에 살고 있지만 영어는 영원히 낯선 언어인데…. 그리고 한국의 영어교육이면 충분하고 되려 넘치는 것이 아닌가?'

정말입니다. 우리의 영어는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인도사람은 인도식 영어로, 중국인은 중국식 영어로 잘들 살아갑니다. 우리만 원형이 제대로 남아있지도 않은 '스탠다드 영어'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걸 보면 영어라는 언어가 효능을 떠나 한국사회에서는 신분을 나타내는 현대판 '호패'와 같은 구실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미 영어는 국적을 잃은 언어가 아닐까요.

영국계 손님이 세탁소에 와서 구사하는 영국 영어는 정말로 귀에 거슬리고 촌스럽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배운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국제사회에서 살 수 있다고 봅니다. 단지 고급영어를 구사하는 영역은 있지만 한국에서 영어화시키지 못하여 안달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깝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님을 보십시오. '성문' 영어로 배운 그 영어로 국제사회의 수장까지 되었지 않습니까?

이곳에도 캐나다 전역에서 가장 일반화된 커피숍인 '팀 호튼스(Tim Horton's)'가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의 커피와 샌드위치로 하루 한 번은 들리는 그런 곳인데 이번에도 한국에서 다니러 온 큰 아이와 함께 커피를 주문합니다. 아빠가 꽁꽁 용을 쓰며 내지르는 주문에 옆에 앉은 아이가 안쓰러워 애써 웃음을 참습니다.

"어…. 라지 커피 따블, 따블…."

주문을 받는 마이크에서도 웃음을 참는 소리가 삐져 나옵니다. 갈수록 주문 하나에도 온 신경을 쓰는 저 자신이 우습기도, 처량하기도 합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유창하게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왜들 영어를 모국화까지 시켜려는 엄청난 시도(?)를 하는 것인지 정말 우려가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들어갈 수 없는 영어의 영역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한국사람의 뒷통수를 몰래 힘껏 때리면 "아얏!" 소리가 튀어나오지 "아우치!(Ouch!)"나 "이따이!"가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영어라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둘째아이가 초등 2학년 때 이민을 와 7년을 보내지만 우리 아이들의 제1언어, 즉 모국어는 한국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언어보다 문화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언어장벽과 오해는 바로 문화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곳 캐나다의 상가, 즉 플라자나 몰에는 그 상가 입주가게의 목록이 입간판으로 서 있습니다. 우리 세탁소 플라자에도 인도식당, 몬트리얼 은행, 경찰서 등의 입주점들의 간판이 탑모양으로 상가 입구에 서 있습니다.

어느 날 몬트리얼 은행의 직원이 저에게 말하더군요.

"너희 세탁소 입간판 패널이 떨어질 듯하여 위태롭다. 길가던 행인이 다칠 수 있으니 건물주에게 연락하여 고치도록…."

건물주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했지만 직원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입간판이니 저는 '사인보드 타워(Signboard tower)'식으로 영역하여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알아낸 것이 '파일런(pylon)'이란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습니다. 그것이 '입간판'의 이곳 명칭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영어사전 검색을 했지만 '상가 입구에 선 광고탑'이란 뜻은 없고 '옛날 마을 입구의 탑문'이란 뜻풀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상가의 광고탑(Pylon)입니다. 문제의 광고탑, 즉 영어로 '파일런(pylon)'입니다. 이 단어를 몰라서 헤멘 걸 생각하면...
우리 상가의 광고탑(Pylon)입니다.문제의 광고탑, 즉 영어로 '파일런(pylon)'입니다. 이 단어를 몰라서 헤멘 걸 생각하면... ⓒ 조석진
문제는 나보다 결코 영어 공부를 많이 했을 리 없는 이웃 인도식당의 주인은 그 단어를 쉽게 사용하는데 저는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 넘게 영어사전 뒤적인 저이지만 그 '파일런'이란 한 단어를 발견하지 못하여 쩔쩔맨 것은 바로 '문화'의 차이 때문입니다.

"유일아, 너 한국 가면 영어학원 선생이든 영어교수님이든 한번 물어봐라. '파일런(pylon)'이란 단어를 아는지, 탑문이라고만 말해도 다행이고…."

이곳에 사는 그 옛날의 영어학도는 이제 영어가 '웬수'같습니다. 제발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 더 이상 강요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냥 그대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저에겐 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탁소에서 돈을 많이 벌어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여는 것입니다. 저의 방식대로 하는 영어학원입니다. 첫 번째 원칙이 학원 아이들에게는 무조건 A4 용지에 고급영어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베껴 쓰게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필사'를 시키는 것입니다. 자연히 문법과 용례가 습득되고 문장력이 생깁니다. 이는 우리 큰아이에게 시도하여 외국어영역에서 1등급을 획득한 '비법'입니다. 큰 아이도 한국 친구들에게 권하니까 전부 '피…글쎄?' 하더랍니다.

둘째 원칙이 캐나다인 강사를 채용하여 구박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나만의 영어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국적없는 영어를 이제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그런 학원….

물론 망하겠지요.

덧붙이는 글 | 영어공부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은 엉뚱한 생각입니다.



#이민자가 본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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