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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식의 시에서 아버지의 상징으로 차용된 동백꽃.
홍성식의 시에서 아버지의 상징으로 차용된 동백꽃. ⓒ 안병기
 
블로그 '욕망하는 인간의 세간잡설'의 주인을 만나다

내게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기만 해도 몸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던 공포가 깨어나서 사지를 벌벌 떨게 한다. 높은 곳에 대한 공포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높은 곳에 대한 관념이나 상징만으로도 크게 두려움을 느낀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특히 서울특별시라는 곳은 그 지명만으로도 심각한 공포증을 유발하는 곳이다.
 
지난 1월 11일, 고소공포증을 무릅쓰고서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겼다. 오마이뉴스 집들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해하시진 마시라. 무작정 상경은 아니다. 그 무슨 상인가를 준다는 바람에 코가 꿰어서 올라간 것이다. 생래적인 고소공포증에다 살짝 간지럼까지 덤으로 얹히게 됐으니 나로선 이중고를 겪은 셈이라고나 할까.
 
세 번이나 지하철을 갈아타고 나서 도착한 오마이뉴스는 "바람 찬 흥남 부두" 아닌 바람 찬 상암벌 누리꿈스퀘어 비즈니스타워 18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기억조차 희미해져 이젠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는 노래 하나가 동승했다. "개척자의 참 바라는 목적이란 그 무엔가".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미루어 알겠다만 오마이뉴스가 이곳으로 온 까닭은 정말 모르겠구나. 설마 나 같은 촌놈 애먹이려고 옮긴 건 아닐 테지.
 
오후 3시 45분. 행사 시작까지는 15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참석자들의 면면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올 테지. 라운지에 서서 기다린다. 어느덧 시간이 4시를 훌쩍 넘겼건만, 행사를 시작할 기미라곤 도통 보이지 않는다. 난 본래 좌우명 따위 거창한 건 키우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도 굳이 좌우명 비슷한 걸 하나만 들라고 하면 "돈 안 드는 시간만이라도 잘 지키자"라고나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지루함을 넘어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난 옥상 밖에서 하염없이 퍼붓는 눈보라를 노려봤다. 그러나 눈보라는 행사 지연의 책임을 나에게만 지우지 말라며 앙탈을 부린다. 흡연의 '오르가슴'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수시로 옥상을 들락거렸다.
 
얼굴이 몹시 큰 사내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흠, 꽤나 반사회적인 얼굴이군. 주먹만 한 얼굴이 대세인 요즘의 트렌드를 철저히 배반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그런데 이 사내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 맞다, 게보린. 아니, 홍성식 기자다. '욕망하는 인간의 세간잡설'이라는 그의 블로그에 걸려있던 사진 그대로다. 이윽고 니코틴 결핍을 채운 그가 다시 라운지로 들어온다. 순간 "아는 체 할까"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그의 글에는 위악적 요소가 들어 있다
 
사실 나는 그의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는 편은 아니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여행시 때문에 잠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가 여행한 지역이 태국이었는지, 라오스였는지 혹은 몽골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것을 시라고 올렸느냐" 면서 몇몇은 아주 대놓고 직설적으로 욕까지 퍼붓던 기억만은 여태 남아 있다.
 
그의 시들은 '외설적'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해야 할까. 어떤 객관적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시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논란과는 별개로 그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는 내게 '안티도 재산'이라는 것을 웅변해준 최초의 사람이다.
 
그의 블로그에 실린 글들을 진지하게 읽어본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홍성식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글을 읽고 나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가 굉장히 위악적인 사람일 거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위선적인 사람이거나 거짓 포즈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위악이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짐짓 악한 체하는 것이다. 반면 위선이란 실제는 선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선한 체 하는 것이다. 위악이 애써 있지도 않은 발톱을 보여주려는데 반해 위선은 있는 발톱을 감추려고 애쓴다. 위악은 진실을 감추려는 제스처일 경우가 허다한데 반해 위선은 정반대의 경우가 많다. 어쩌면 위악은 일부러 냉정함을 가장함으로써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려는 몸짓일 수도 있다. 자기방어를 위한 기제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뻔한 결말. 흠잡을 데 없는 결론. 아름답기 그지없는 문체. 그러나 읽고 나면 아무런 깨달음도 눈곱만한 감동도 재미도 없는 글.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내용은 너무 뻔한 것이라서 차라리 뻔뻔스럽기까지 한 글. 아무튼 그의 시와 글들은 점잖은 글, 슬로건으로 가득 찬 오마이뉴스 블로그에선 이단아의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홍성식의 글들은 거기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홍성식이 쳐놓은 위악의 덫에서 놀 뿐이지 홍성식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찌어찌하여 시상식이 끝났다. 누구의 소개였던가. 뒤풀이가 열리기까지는 막간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홍성식과 얼렁뚱땅 수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내게 속지에 사인한 다음 자신이 쓴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라는 책과 <아버지꽃>이란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이 두 가지 선물이 내 고소공포증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음을 뒤늦게나마 밝혀두는 바이다.
 
아버지가 없는 시대에 아버지의 존재감을 되살려내다
 
 홍성식 시집 표지.
홍성식 시집 표지. ⓒ 화남
밤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의 시집을 대충 훑어 보았다. 2005년 5월에 나온 시집의 책날개엔 간단하게나마 그의 프로필이 적혀있다.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해서 <국토>의 시인 조태일에게 사사한 것으로 돼 있다.
 
시집을 펼쳐 표제작인 '아버지꽃'을 읽었다. 1980년에 나온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라는 시집 도처에는 부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해 가을'이란 시에선 심지어 "아버지, 어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고까지 존재를 부정당한다. 그런데 홍성식, 그는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까마득한 옛날에 용도 폐기된 아버지라는 존재를 노래하는가.
 
아이는 울며 돌아왔다
다그치는 나에게 학교 안 동백나무가 베어졌다는
의외의 대답
망연자실, 묵묵부답
먼 진원지에서 서러움이 괘종시계처럼
똑딱거렸다
아 ․ 버 ․ 지
 
눈썹에 이슬 맺히는
자욱했던 물안개길
불 맞아 웅크린 짐승의 눈빛으로
선홍색 동백은 점점이 반짝였다
 
눈물 덜 마른 얼굴로 잠든
꽃 그림의 셔츠만 찾는
기르는 고양이와도 얘기를 나누는
식물 같은 아이
나의 아이
 
세상 젤 서러운 꽃이라던
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시샘하듯 목을 꺾는 생명 같은,
어린 목숨 같은 꽃이라던 동백
아버지는 흩어진 생명
목숨의 조각들로 목걸이 만들어
날 무등 태웠었다
 
아이의 꿈 속에서 나무는 살아날까
평화로운 잠으로 나도 가고 싶건만
다시 아기가 된 아버지의 응석에
모조청자는 푸른 비명으로 깨어지고
 
아버지
당신 닮은 저 아이는,
저 아이의 아버지인
나는 - 홍성식 시 '아버지꽃' 전문
 
시를 읽어내려가자마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존재의 도착을 겪는 시인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아이가 되고 그가 아버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아버지 당신 닮은 저 아이는, / 저 아이의 아버지인/ 나는"이라고 고백하는 시의 마지막 연을 읽으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어쨌든 "아이는 울며 돌아왔"고 시 속 화자인 '나'는 울며 돌아온 아버지를 다그친다. "학교 안 동백나무가 베어졌다"는 것이 아이 울음의 내용이다. 그런데 동백나무가 베어졌다는 사실이 어찌 아이의 울음의 내용이 될 수 있는가.
 
겨울, 혹은 초봄에 피는 동백꽃은 마지막이 장렬한 꽃이다. 꽃잎이 하나 둘 뜯겨서 살포시 흩날리면서 지는 게 아니라 모가지 채 툭, 떨어져 버린다. 이런 속성 때문에 동백꽃은 우리에게 전사(戰士)의 이미지로 비친다. 예전엔 아버지라는 존재 역시 우리에게 동백꽃처럼 전사의 이미지로 익숙한 존재였다. 홍성식이라고 해서 그런 동백나무 혹은 동백꽃의 이미지가 다른 사람과 크게 어긋나겠는가.
 
아이의 꿈속에서 동백꽃이 다시 피기를
 
시속에서 아버지와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존재이다. 동백꽃 또한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 묘사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세 존재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다만 "아버지는 흩어진 생명/ 목숨의 조각들로 목걸이 만들어/ 날 무등 태웠었다"라는 구절처럼 동백꽃은 때로 그의 추억의 대상이나 객체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통상적인 경우, 남자 아이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성장한다. 자기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어머니의 남편인 아버지를 자기의 경쟁자로 적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홍성식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이러한 그의 '집착'은 "평화로운 잠으로 나도 가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홍성식은 아버지와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찌 됐든지 간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깡그리 부정당한 채, 그 악덕만이 도드라져 보이는 세태 속에서 아버지와의 일체감을 드러내는 시를 읽는 기분이란 의외의 보너스를 받는 그런 기분이다. 홍성식은 "아이의 꿈 속에서 나무는 살아날까"라고 의문을 품지만 나는 아이의 꿈 속에서 동백꽃이 살아나길 기원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홍성식의 시 '아버지꽃'을 읽어 보았다. 시를 읽는다는 건 결코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문자의 등 뒤로 숨어버린 채 숨바꼭질을 청하는 마음이란 일물(一物)은 좀처럼 제 머리카락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숨어버린 마음을 찾는 작업이 어렵다는 걸 알자, 등장한 것이 평론가라는 전문적인 직업이다. 그러나 세상에 직업 한 가지만을 더 늘렸을 뿐 별 도움은 되지 않는 듯하다. 결국 시인의 숨은 마음을 찾아내는 나침반은 독자 자신의 직관이나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오독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긴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인생의 선배로서, 또 시를 애호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앞으로 홍성식이 좀 더 깊이 있는 시를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에겐 그만한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오마이뉴스 기자와 뛰어난 시인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진력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에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다. 이제부터는 시(詩)가 그를 윽박지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되었으면 싶다. 모르긴 해도 그것이 그가 또 하나의 아버지로 받들어 모시는 스승 조태일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는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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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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