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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혹한이 몰아치고, 잘 오지도 않던 눈까지 쏟아져 땅을 질척여 놓자 나는 더 밖으로 나가지 못해 몸살을 앓게 되었다. 방학이라 빈둥대는 아들을 꼬드겨 느닷없는 산책도 나가고, 해묵은 통장을 꺼내 일부러 은행도 갔다 오고, 서점에 들러 통일성 없는 책들도 몇 권이나 사들고 들어왔다. 남들 다 아랫목 파고들며 집 귀신이 되고자 하는 겨울에 홀로 신열에 들떠 방황해야 하는 내 운명이여.

 

돈 들여 고쳐놓은 나의 시력이 부쩍 저하되는 것을 절감하며, 책 속에 고개를 파묻은 지난 몇 주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겨울로 기억될 것이다. 깨알 같은 글자와 다시금 옥편을 뒤져봐야 할 만큼 어려운 한자들이 도처에 널린 교재를 보면서, 나는 더 이상 겨울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지 않게 되었으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책 속에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는 어느새 근질거리는 옆구리에서 작은 날개가 솟아나와 나비로 변신해 있었고, 어디나 마음껏 날아다니는 꿈같은 환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고전 속에 살아서 펄펄 날아오르는 황홀한 나비들은, 월요병의 피로를 뚫고 용산의 후미진 골목을 꾸역꾸역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들 사이로 유유히 날아 오른다. 막 수능을 본 10대 소녀와 반백의 노신사까지 고루 포진된 ‘學童’들과 그들의 혼을 빼앗아 18세기로 끌고 다니는 스승의 강론은 우리들의 ‘삶’과 ‘공부’와 ‘책’과 ‘세계’를 하나로 버무려 세 시간이 넘도록 연희를 펼친다.

 

말 그대로 18세기 조선 지성의 콘서트와 파티와 뒷풀이 까지 모두 맛볼 수 있는 자리여서, 모두 앉은뱅이 책상과 방석에 껌처럼 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압도하는 에너지가 가득하고, 더불어 신이 내린 달변으로 좌중을 몰아가는 스승의 눈빛이 형형하다. 가히 어디에서고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어깨에 둘러멘 책임으로 발 뻗고 잠도 자지 못하는 무거운 重年이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왔고, 미궁 속으로 빠져 들 듯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지독한 통증이 거듭되었다. 자칫 무게 중심을 잃어 검은 강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 속으로 실족하고 나면 ‘끝장’이라는 압박감만 들었다. 내 스스로 중심을 잡는 일이 급선무였다.

 

가슴 위에 얹혀있는 돌을 걷어내기 위해 책을 읽었다. 늦공부에 발을 딛게 된 것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책과의 인연 때문이었고, 하필이면 연암이나, 노자나 논어와 같은 오래된 것들에만 눈길이 머물다 ‘수유너머’의 겨울특강 “18세기 조선 지성사의 배치”를 듣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내 현재 삶의 치유와 새로운 모색의 공부 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넘나들게 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진정한 ‘공부’의 묘가 있었다. 자신에게 파고들어 현실과 세상까지 함께 뛰어 넘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면서 타인과 세상에 무리 없이 동화되는 ‘불혹’의 中年으로, 중심을 잘 잡고 살 수 있을까. 다시금 희망이 꿈틀대며 살아나고 있었다.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야 하는 아이와 그와 전혀 무관하게 그악스러운 자본이데올로기의 괴물로 진화하는 교육현실 속에서 산골 대안학교 전학을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옳은 길이라고 믿고 싶었다. 자연과 사람과 교육은 불가분의 운명이고, 스스로 자신을 세우지 못한 채 몸뚱이만 나이 든 어른이 되 버리는 불우한 처지에서 구해내고 싶었다.

 

내 앞에 놓인 삶에 비굴해지지 않는 태도를 갖자, 그리고 나비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과 삶 속으로 비상하자! 서로를 놓아주고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너와 내가 되자! 마음 속에서만 공명하는 말들을 언젠가는 진솔하게 털어놓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명분과 구태와 아집에 사로잡혀 지성의 숨통을 옥죄던 조선시대에 목숨 걸고 소신을 관철시킨 그들처럼 중심잡고 설 줄 아는 단단한 중년이 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그들처럼 중심잡고 설 줄 아는 단단한 중년이 되고 싶다.


#교육#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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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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