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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밤, 경찰서에 울며 뛰어들었다는 베트남인 여성 끙(19·Cung)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 밑은 먹물을 먹인 것처럼 거무스름했다.

끙을 보호하고 있던 경찰에 의하면 형부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여러 번 왔지만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고, 통역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끙이 형부에게 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여 내게 연락을 했다고 했다.

경찰서에 끙을 만나러 갈 때 마침 베트남 출신 여성 이주노동자가 동행했는데, 그녀가 베트남어로 말을 걸자, 끙은 반가움에 눈물을 먼저 흘렸다.

끙은 언니의 출산에 즈음하여 언니의 산후조리를 도와달라는 형부의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비자 신청을 하고 출국 준비를 할 때 언니가 출산 직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핏덩이 조카 얼굴이라도 볼 생각으로 잠시 입국했던 것이 지난 10월이었다.

조카 얼굴이라도 볼 생각으로 잠시 입국했는데…

끙은 입국 후 석 달 동안 아이를 돌보느라 병원과 형부 집을 오가며 지냈고, 그 기간 동안 베트남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던 끙이 갑자기 경찰서를 찾아가서 도움을 호소한 표면적인 이유는, 베트남에 계신 어머니가 심장 수술을 위해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수술을 위해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형부는 끙의 출국을 위해 아무런 준비를 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끙이 돌아가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하며 끙에게 돌아가지 말 것을 요구했다. 시급히 귀국해야 했지만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하던 끙에게 경찰에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한 사람은 대만으로 시집 간 큰 언니였다.

큰 언니는 동생의 장례식 때 한국에 왔었는데, 형부란 사람이 처제를 초청했다는 사실에 대해 내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일시 방문한 처제에게 형부는 3개월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만들게 돼 있는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 주고 살림을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형부는 식사를 할 때면 끙 옆에 찰싹 달라붙어 불편하게 하고, 어머니 수술 문제로 급하게 귀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카를 핑계로 끙을 붙들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큰언니는 “당장 경찰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만나게 된 사람이 끙이었다. 처음 사연을 들었을 때,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처제가 울면서 코앞에 있는 경찰서로 뛰어들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밤늦은 시간까지 찾아오지 않았다는 형부라는 사람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부라는 사람을 만난 건 자신이 ‘끙의 짐을 꾸리고 나갈 테니, 오늘 출국시키면 좋겠다’는 연락이 온 후였다. 귀국 일정을 토요일에 맞췄지만, 급하게 연락을 해 온 형부가 끙의 옷가지를 비롯해 얼마 되지 않는 짐을 갖고 있어서 그러자고 하고, 그를 만났다.

태도 돌변한 형부란 사람

끙의 짐을 꾸리고 나온 그는 자신이 끙을 공항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끙은 기겁을 하며 쉼터 직원 뒤로 숨는 것이었다. 공항까지 가는 길에 끙은 형부 얘기는 피하면서도 조카 얘기는 줄곧 하였다.

“조카가 대여섯 살 정도 되면 한번쯤 한국에 와서 만나고 싶어요.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는 조카가 알았으면 해서요.”

그런 끙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얘 아빠가 아이는 잘 양육할지 걱정이 앞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그래요, 연락하면서 지내세요”라고 답을 하고 답답함을 삭였다.

답답함을 삭이며 도착한 공항에서 우리는 또 한 번 형부라는 사람의 이상한 태도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렇게 처제의 귀국을 방해하던 그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었다. 출입국 소속을 하는 직원에게 “이 여자가 다시는 한국에 오지 못하도록 처리해 주세요”라고 말을 하며, 악의가 있는 듯이 출국 수속을 하는 처제를 졸졸 따라다니며 간섭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끙이 비행기를 탔을 즈음에 한마디 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도 끙이 갑자기 간다고 하니까, 형편이 어려운데도 얼마씩 모아서 주머니에 집어넣어줍디다. 선생님은 끙이 왜 선생님을 피하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제 삼자가 봤을 때도, 그러는 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헤어지면 남이라지만, 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의 동생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일관했던 형부라는 사람은 처제를 처제로 생각하거나 대우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한참 힘들어 할 때, 베트남에서 전화가 왔다.

"땡큐."

한결 밝아진 끙의 목소리였다. 언니의 죽음과 조카와의 기약없는 이별, 어머니의 수술 등 스물이 채 안 된 젊은 이가 겪기에는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그녀지만, 언젠가 조카를 만나 자신의 언니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고기복 기자는 이주노동자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국제결혼#베트남#이주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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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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