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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빗길을 걸으며

 

빗길을 걸으며 헌책방으로 갑니다. 책 하나 만나고자 헌책방으로 갑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당신은 헌책방만 다니느냐고. 싱긋 웃습니다. 글쎄요, 저는 책방에 가는걸요. 님께서 말하는 헌책방도 다니고 새책방도 다닙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당신은 헌책만 사느냐고. 빙긋 웃습니다. 글쎄요, 저는 책을 보는 사람이지, 헌 것이나 새 것으로 나뉘는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은 아니에요. 올해 나온 책이라 해서 새로운 줄거리를 담은 책이 아니잖아요. 오래도록 묵혀 두었다가 올해 나온 책이라 한다면, 이 책에 담긴 줄거리는 마냥 새로울까요? 얼마나 새로울까요?

 

1950년에 프랑스에서 나왔던 책을 올해 우리 말로 옮겨서 펴낸다면, 이 책은 새로운 책일까요? 2002년쯤에 나왔으나 벌써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에서 겨우 찾아 읽는 책은 헐어버린 책일까요? 1997년에 나온 책을 헌책방에서 사서 읽는다면, 저는 구닥다리 삶이나 좇는 사람일까요?

 

 누군가 또 묻습니다. ‘헌책’이란 무엇입니까? 후후 웃습니다. 글쎄요, 책이면 책이지 왜 헌책이고 새책일까요. 뭐, 새책이야 책 뒤쪽에 찍힌 값대로 팔 수 있는 물건이고, 헌책이야 책 뒤쪽에 찍힌 책값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 수 있는 물건이겠지요. 구태여 나누고 싶으면.

 

 헌책이라 해서 늘 뒤에 적힌 책값보다 싸야 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셔요. 1980년에 나온 책이면 으레 1800원 2000원이 안 되는 값인데, 그때 나온 드문 책을 2007년 올해에도 2000원만 주고 사겠다면, 또는 헌책이니까 반값만 치르겠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도둑놈, 또는 도둑년 마음보가 아닐까요?

 

 그냥 책을 읽어 주셔요. 마음을 살그머니 열고 책을 집어 주셔요. 셰익스피어만 문학이 아니에요. 김소월만 문학이 아니에요. 박완서만 문학이든가요. 박지원만 정약용만 고전이 아니에요. 당신한테는 아주 낯설 이름들도 문학이에요. 우리한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도 책이에요. 있는 그대로 보아 주셔요.

 

책에 붙어 있는 글쓴이 이름은 지워 주셔요. 책을 펴낸 곳 이름도 지워 주셔요. 안을 들여다보셔요. 수험생들한테 교사들이 으레 하는 말, ‘행간을 읽으라’는 소리가 있잖아요. 종이에 적힌 활자가 아니라, 종이에 박힌 잉크가 아니라, 종이에 꾹꾹 눌러 적은, 종이에 꽉꽉 눌러 새긴 삶을 느껴 주셔요.

 

이야기를 껴안아 주셔요. 가슴으로 부대껴 주셔요. 책은 사람이에요. 책은 삶이에요. 책은 이야기예요. 책은 눈물이고 웃음이에요. 피비린내 나는 아픔이며 무지개 같은 즐거움이에요.

 

 어느덧 헌책방 앞에 닿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 낮, 헌책방 앞 거님길에 늘어놓은 책들은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틀어 놓은 전축에서는 옛노래와 새노래가 번갈아 나옵니다.

 

헌책방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저냥 지나가기만 합니다. 다들 갈 곳이 있겠지요. 헌책방에 갈 마음이 없겠지요.

 

요즘 같은 세상, 책상 앞에 앉아서 인터넷 찾아보기를 하면 그만이니까, 온갖 이야기가 줄줄줄 쏟아지니까, 손에 책먼지 묻혀 가면서 책을 뒤지지 않아도 되니까, 삶이 담긴 책이 아닌 지식과 정보를 얻으면 그만인 종이뭉치만을 조금 더 값싸게 사면 그만이라고들 하니까, 자기한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책이야 몰라도 그만이고 모른다 해서 굶어죽을 일 없으니까, 헌책방에는 책다운 책이 있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안 하고 있으니까.

 

 

 헌책벌레 한 마리 꾸물꾸물 빗속을 헤집고 서울 회기역 앞에서 외국어대 가는 길목 버스정류장 옆에 옹송그리고 있는 헌책방 〈책나라〉로 찾아듭니다.


 〈2〉 책에 담긴 숨결


 “안녕하셔요!” “어, 오랜만이네! 바쁘시니까 오랜만에 오시네. 지금도 충주 사시나?” “아니요, 지난 사월에 인천으로 옮겼어요.” “어유, 이사하느라 힘들었겠네요. 책도 보통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다 옮겼어요?” “저야 뭐 짐이 책밖에 없으니까요. 늘 하던 대로 했지요.” “하시는 일은 잘 되고요?” “늘 하는 대로만 하고 있죠, 뭐.”

 

 가방을 내려놓고 사진기를 꺼냅니다. 헌책방 〈책나라〉 아주머니가 타 주는 차 한 잔을 얻어마십니다. 그리 춥지는 않지만 따순 차 한 잔을 받아쥐는 손이 살살 녹습니다.

 

 <니체/김광진 옮김-로댕>(범우사,1973)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언제 나온 책일까 생각하며 판권을 살핍니다. 없네요. 누군가 판권을 찢었습니다. 헌책방 〈책나라〉로 들어오기 앞서, 예전에 누군가 슬그머니 찢은 듯합니다.


..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내가 한 가지 일을 두고 성심껏 애쓴 탓이지요. 한 가지 것을 이해하고 보면 무엇이라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오. 어째서 그런고 하니 모든 것에는 똑같은 법칙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탓이오……” ..  〈125쪽〉


 새책방에만 다니고 헌책방에는 안 다녔더라면, 저는 ‘책방은 어떤 곳’인 줄 몰랐으리라 봅니다. 새로 나오는 반짝반짝하는 책만 읽고 겉이 허름하거나 오랜 더께가 얌전히 앉은 헌책은 안 읽었더라면, 저는 ‘책은 우리한테 무엇’인가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한테 좋게든 궂게든 도움이 됩니다. 밝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있고 어두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윽박지르는 자동차꾼을 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자전거한테 마음을 넓게 쓰는 자동차꾼을 보면서 활짝 웃다가, 저는 제 이웃들한테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 이럴 때 이분이 찾아나선 것은 생명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이분은 이 생명을 보고 경탄합니다. 언젠가 이분이 글로 쓴 적도 있지요. 생명, 이는 바로 놀라움이니까요. 이 생명이란 것을 이분은 당신 집이 있는 시골의 외로움 속에서 더욱 더 경건한 사랑을 베풀면서 감싸 주는 법을 익혔던 것입니다 … 채소밭 캬비쓰 잎사귀 어디를 보아도 덮인 것은 생명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  〈123쪽〉


 처음 인천에서 태어나서 골목길을 뛰놀 때는 잘 몰랐습니다. 머리통이 굵어지며 인천을 떠나 서울로 와서 살 때에도 잘 몰랐습니다. 시골살이를 하며 일을 할 때에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고향 골목길을 다시 걷는 한편, 우리 나라 구석구석 새로운 찻길이 널찍하게 끝없이 늘어나고, 이런 찻길은 도심지 작고 가난한 집터를 싸그리 몰아내고 들어서는 모습마저 보면서 비로소 느낍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는, 작은 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못 보면서 산다고. 집안에 꽃그릇 예쁘장하게 들여놓을 줄은 알고, 난초가 값이 얼마짜리인지는 헤아릴 줄 알아도 길가 풀포기 하나, 벽돌담 틈에서 자라는 풀포기 하나에 얼마나 깊은 자연 숨결이 담겨 있는지 못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흙 한 줌 밟을 일 없이 살고, 풀포기 한 번 쓰다듬을 일 없이 살며, 바람 한 자락 느낄 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Norma Simon(글),Joe Lasker(그림)-All kinds of families>(Albert Whitman & com,1976)는, 아이들한테 ‘사람들한테도 식구는 여러 모습’이고, 사람 아닌 짐승들한테도 식구는 갖가지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따뜻합니다.

 

 <ふしぎがわかる しぜん圖鑑 : こんちゅう>(フレ-ベル館,1990)는 1990년 5월 15일에 1쇄를 찍고 1996년 4월 3일에 14쇄를 찍습니다. 그림과 사진을 고루 섞으며 자연 삶터와 사람 삶터에 함께 살아가는 벌레들을 죽 보여줍니다. 모기도 일곱 가지, 파리도 열일곱 가지를, 바퀴벌레도 네 가지를 보여주고, 바퀴벌레가 알낳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나방이를 찬찬히 보여주고, 잠자리가 알을 어떻게 낳고 알이 어떻게 깨어나서 자라는가도 한살이로 보여줍니다.

 

 <송기숙-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화남,2005)이라는 수필모음을 봅니다. 처음 나왔을 때 여러 차례 광고를 보았는데, 그때는 딱히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 그러나 일주일을 기다려 나온 건빵이, 많을 때는 다섯 알 적을 때는 세 알이었다. 정량은 한 사람 앞에 한 봉지였지만 중간에서 다 떼먹어버린 것이다 ..  〈113쪽〉

 


 한국땅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즐겨 합니다. 아니, 할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 아닌 살인기계로 만들며, 사람을 사람 아닌 계급장으로 바라보게 하고, 사람을 사람 대접 아닌 짐짝 대접으로 하게 뒹구는 군대이니, 이런 데에서 쓰리게 겪던 이야기라든지, 여느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을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어찌 조그마한 몸뚱이에 가두어 놓을 수 있을까요. 예나 이제나 군대에서는 간부들이 빼돌린 물품과 돈이 어마어마한데, 이런 간부들 도둑질을 벌했다는 소리는 여태껏 들은 적이 없습니다.


.. 그들은 그럴싸한 소리를 앞세우며 쿠테타를 했지만, 실상은 군대에서 누리던 자기들의 천국을 전국 단위로 확대시킨 셈이었다 ..  〈118쪽〉


 군대에서 누리던 잇속을 전국으로 넓힌 정치꾼들, 대학교에서 누리던 잇속을 전국으로 넓힌 정치꾼들, 기업에서 누리던 잇속을 전국으로 넓힌 정치꾼들, 구청이나 시청에서 누리던 잇속을 전국으로 넓힌 정치꾼들, ……. 그런데, 정치꾼뿐 아니라 우리들도 자그마한 잇속보다는 조금 더 큰 잇속을 바라고, 한 달 오십만 원이나 백만 원 벌이보다는 한 달 이백만 원이나 천만 원 벌이를 바라지 않는가요.


 〈3〉 다시 사들이는 책


 사진책 <이기원-세상 만들기>(눈빛,1995)가 보입니다. 지난 1999년, 출판사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서 일할 때, 사진찍는 선배가 추천해 주어 알게 된 책. 그때 한 권 사서 보다가 누군가한테 선물해 주었고, 저는 헌책방에서 낡은 책을 하나 장만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책은 겉장이 없고 낡았기에, 오늘 만난 겉장도 있고 깨끗한 판을 새로 장만하기로 합니다. 좋은 사진책이라면, 이렇게 운이 따라서 또 만나게 되었을 때 한 번 더 마련해 놓아도 좋겠지요.

 

 

 책값을 치르기 앞서 살살 쓰다듬다가 품에 안아 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아직 너를 모르는 사람한테 즐거움을 주어도 좋을 텐데, 내가 오늘 욕심을 부리지 않았나 모르겠구나. 나는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하는데, 우리 도서관에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틈틈이 너를 보여주고 펼치도록 해 준다면, 이렇게 해서 너를 알아가고 느껴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차근차근 늘어갈 수 있다면, 이런 일은 이런 대로 좋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되뇌어 봅니다.

 

 책값을 치릅니다. 빗줄기는 가늘어지지 않습니다. 우산을 펼칩니다. 빗길을 걷습니다. 예전, 고작 네 해쯤 앞서까지만 해도 골목집으로 가득하던 이문동 한켠에 삼십 층 가까운 높이로 올라선 ㄹ아파트 앞을 지납니다. 이 앞에는 건널목도 없었는데, 아파트에서 빠져나가는 자동차 때문에 새로운 신호등과 건널목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건널목은 시늉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동차가 신호 받아 나가도록 시늉으로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외국어대학교 앞 세거리에 섭니다. 복사집 ㅈ에 들를까 했는데 오늘은 마침 쉬는 날이네요. 대학교 앞 신문사지국에서 살면서 소식지를 엮을 때 늘 이 집에서 복사를 했기에,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푸른불이 들어와 맞모금으로 건넙니다. 이곳은 세 군데 건널목 불이 한꺼번에 바뀌기 때문에 길을 건너기에 좋습니다. 다른 곳에도 이렇게 건널목 불을 마련해 주면 나을 텐데 하는 생각. 오르막길을 걷습니다. ㅇ마트가 있던 자리가 헐리고 아파트 짓는 공사를 합니다. ㅇ마트가 들어설 때에는 이문시장을 쓸어내고 지었는데, 아파트는 동네 큰 마트를 밀어내고 짓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경희대 앞 책나라 / 02) 960-7484
 http://www.BookNation.co.kr


태그:#헌책방, #책나라, #서울, #회기동, #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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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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