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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복된 일은 무엇일까? 수십억짜리 아파트, 일류대학 졸업장, 권력을 가진 경력, 수십억이 넘는 재산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육신 장막이 끝나는 순간 더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가지고 가려고 하지만 결코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가지고 간다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인생살이 40년 동안 자신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책을 남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진짜 복이다. 창비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가 대담과 좌담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표명한 '말'들을 정리한 <백낙청 회화록 1-5>은 정말 대단한 역작이다.

 

5권에는 40년 동안 창작과 비평을 통하여 각 시대마다 지식인들이 문학과 사회 민족 정치 역사 등을 주제로 벌인 치열한 논쟁을 담고 있다. 백철 김동리 선우휘 박현채 등 지금은 다시 육신을 통하여 만날 수 없는 이들과  리영희, 강만길, 고은, 김지하,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드릭 제임슨, 가라타니 고진 등 국내외 지식인 133명(국외 12명)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주의 등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한 이론적 화두를 내어놓고 있는 백낙청이지만 1권 '작가 선우휘와 마주 앉다'에서 사르트르를 두고 선우휘가 "싸르트르를 끝까지 충실하게 추종하게 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혁명까지 가는 것이 아니냐. 말하자면 그가 작가의 역할을 기존사회의 모순을 파헤쳐야 한다는 데 둔다고 할 그러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이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백낙청 회화록 1권> '작가 선우휘와 마주 앉다' 16쪽) 

 

30살 평론가 백낙청은 말한다. “요즈음 특히 좌경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모든 행동을 우리 지식인들이 맹종한다면 우리 지식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좌경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귀결이겠지요”라고 말한다. <백낙청 회화록 1권> '작가 선우휘와 마주앉다'(16쪽)는 군부폭압정권이 사상과 사유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은 시대 아픔을 느끼는 청년 백낙청의 안타까운 반응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거대한 보수논객 앞에 30살 청년 진보지식인은 작게 보인다.

 

논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논쟁이란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논쟁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와 독재권력이 사상과 사유를 획일화시켰기 때문이다. 논쟁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을 설득시켜 가는 과정이며, 또한 상대방 주장을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과학방법론으로 맞다면 인정해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논쟁은 즐거움이다. 얼굴 붉히면서 격정적인 토론을 하지만 서로를 존중한다. 획일화된 사회는 존중을 찾을 수 없으면 흑백만이 난무한다. <백낙청 회화록>에서는 논쟁을 즐기면서 상대방 주장을 인정 비판하는 과정을 상세히 전해준다. 백낙청은 항상 상대방 주장 가운데 자신이 동의하는 부분을 먼저 밝힌 뒤 이를 자신의 생각으로 덮어버린다. “그 점은 저도 동감입니다만” “물론 저도 거기에 동감인데요” “그건 그렇지요, 그러나”와 같은 표현에서 그가 논쟁할 줄 아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백낙청 회화록>은 지난 40여년 백교수와 얼굴을 마주한 당대 지식인들의 사유와 인격을 만날 수 있으며, 참여문학을 휴머니즘이 표현한 백철에게 싸움닭 처럼 격정을 보여준 김동리 대담을 다룬 <1권 '근대소설 전통 참여문학' 부분> 과 '민족문학' 아닌 문학도 의미있음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김우창 교수의 분투를 다룬 <1권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영향'> 부분은 1권에서 가장 재미 있게 읽은 부분이다.

 

우리 사회를 논쟁이 없는 사회라고 한탄하지만 40년 창작과 비평에는 분명 논쟁이 있었다. 사유와 사상이 다른 이들이 인간과 사회, 역사, 민족, 정치를 두고 치열한 지적 논쟁을 했기에 창작과 비평은 지금도 뭇 사람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40년 우리 지성사를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론 투쟁에 적극적이다. 이론이 곧 실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무시가 아니라 더 나은 진보를 위한 노력이다. 백낙청은 말했다. "남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저 나름으로 그런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글'이 아니라 '말'을 담았기에 읽는 독자는 좌담과 대담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생생한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사상과 사유의 영역과 철학이 달라도 그들은 논쟁했고, 무시하지 않았고, 서로를 설득하려고 했다. 자신의 철학과 사상은 지키려고 하지만 상대에게는 자신의 사유 영역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여기에는 강압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회화록을 보면 이전에는 긴 대담과 좌담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짧은 대담과 좌담이 많다. 2권(1985~90)과 5권(2005~2007)에 각각 실린 글은 9편과 34편으로 큰 차이가 난다. 책 두께가 비슷한데 실린 편수는 4배 가량 차이가 난다. 시대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논쟁은 많은 시대이지만 깊이 있는 논쟁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백낙청 회화록 부분에서 뽑은 말들이다.

 

“극복의 대상으로서 분단체제를 말한 겁니다. …남북한 모두가 포섭된 하나의 체제를 인식하자는 거지요. 그렇다고 완결된 체제는 아니고 말하자면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로서, 남북 양쪽의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이익에 위배되고 전세계적으로도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익에 반대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제4권, 1999년 <창작과비평> 수록, 미 뉴욕주립 빙엄튼대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와의 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세계체제,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 중에서)
 
“민족문학론이 지금 싯점에서 그 내용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문학’이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채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제5권·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종합토론 ‘다시 민족문학을 생각한다’ 중에서)

 

40년 전 대담과 좌담이라 별 감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대가 더 깊은 사유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말들을 만날 수 있다. 40년 동안 우리 지식인들이 남긴 치열한 사회와 민족, 국가와 나라, 정치, 역사, 문학을 논한 지식과 사유 논쟁 속으로 들어간다면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1권 1968-1980년, 2권 1985년-1990년, 3권 1990년-1997년, 4권 1997년-2004년, 5권 2005년-2007년을 담았다.

덧붙이는 글 | <백낙청회화록 1-5권>  백낙청 회화록 간행위원회 ㅣ 창비 ㅣ 각권 28,000원


백낙청 회화록 1~7 세트 - 전7권

백낙청 회화록 간행위원회 엮음, 창비(2017)


#백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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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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