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 출근길에 까치 한 쌍을 만났습니다. 한 마리는 그저 옆에 섰고, 다른 한 마리는 풀섶을 헤쳐가며 먹이를 찾아 멀쩡하게 서 있는 그 놈의 입속으로 연신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지극 정성인 지어미 혹은 지아비가 조반을 차리나 보다 싶었는데,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허우대는 멀쩡하고 덩치는 오히려 더 크면서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놈을 자세히 보니 까맣게 윤기 흐르는 깃털 사이에 갈색 얼룩 같은 포근한 솜털이 정수리에서 잔등이까지 듬성듬성 남아 있었습니다. 아, 그 녀석은 새끼였던 것입니다.

 

‘햐,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하는구나. 다 큰 놈이 부리 끝 하나 까딱않고 가만히 서서 부모가 잡아주는 먹이를 날로 받아 먹다니, 사지 멀쩡하건만 지가 무슨 청년 실업자라도 된단 말인가, 그리고 부모도 그렇지, 저만큼 키워 놓았으면 스스로 먹이 잡는 법을 가르칠 생각은 않고 언제까지 저렇게 제 부리로 찾아 먹이며 과잉보호를 할 참인지.’

 

길에서 자주 새들을 만나지만 모자인지, 부자인지, 모녀인지, 부녀인지는 몰라도 그날 그 까치들이 하는 꼴이 대번에 얄미워져서 마치 사람 세상에서 부모 자식간의 꼴불견인양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습니다. 새들이라고 왜 성향과 개성이 독특하지 않겠습니까. 평소 유별나게 설쳐대던 까치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호주에서 까치란 놈은 8월경의 산란기 때면 제 알을 보호한답시고 마을 어귀의 나지막한 울타리에 점령군처럼 진을 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다 지나는 행인의 무고한 이마나 뒷통수를 쪼아대서 피를 흘리게도 합니다. 세상에 저희 새끼만 있는 줄 알고, 내 자식은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하는 짓거리가 같잖지요.

 

오죽하면 까치를 쫓기 위해 노려볼 듯 부릅뜬 눈알을 앞 뒤로 그려넣은 ‘까치 모자’라는 것까지 등장했겠습니까? 제 새끼 챙기기라면 극성도 그런 극성이 없더니 다 키운 자식새끼를 독립시킬 생각은 안 하고 끼고 다니며 저리도 집착하고 있으니 참 딱한 노릇입니다. 하기야 노후에 자식에게 뭘 바라고 저러기야 하겠습니까. 그저 보기만 해도 안쓰러워 애면글면 하는 게지요.

 

뻐꾸기가 그런다던가요? 남의 둥지에 살짝 알을 낳는다는 새 말입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내빼버린다니 그런 몰염치가 어디 있답디까? 그런데 그 부모에 그 자식 아니랄까봐 생명력 억세게 일찌감치 태어난 뻐꾸기 새끼들은 원래 그 집 자식들을 둥지 밖으로 슬그머니 밀어내 죽여버린다죠. 섬뜩한 비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걸 보면 부모 보고 배운 걸테니, 문제아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뻐꾸기나 까치나 문제가 많은 부모입니다. 자식이라면 벌벌 떠는 과잉보호나, 무조건 남을 짓밟고 변칙을 써서라도 올라서야 한다는 안하무인격 경쟁을 부추기는 꼴불견 새들입니다. 반면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 한몸 죽는 것도 마다 않겠다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희생형 부모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시고기가 그런다고 들었습니다. 키우는 동안에는 험난한 세상에서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입속에 넣고 다니고,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제 몸뚱이를 아예 다 뜯어먹으라고 내 준다고 하는데, 어미도 아닌 아비가 그런다고 하니 우선 그 막무가내식 부성애에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시고기 아버지하고 한국 부모들하고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지 않나요? 비싼 과외비 퍼들여 공부시켜 대학 보내고, 전세라도 장만해서 출가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업 밑천 아니면 생활비 대주고, 손주 봐주고, 많든 적든 죽을 때 아낌없이 물려주는 패턴이 ‘가시고기형’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까치나 뻐꾸기 부모하고도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저는 우연히 까치를 만난 것을 계기로 ‘ 까치형, 뻐꾸기형, 가시고기형 자녀 양육 방식’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졌습니다.

 

물론 저도 제가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줄 압니다. 새나 물고기 같은 것들이 무슨 가치관이 있어서 새끼들에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자연 생태가 그렇게 생겨먹은 탓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일전에 신문에서 ‘한국 부모들의 자녀 뒷바라지 어디까지‘ 라는 기사를 보니 ‘한국형 부모’라는 말 외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는 유별스런 우리의 부모노릇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더군요. 한 마디로 ‘뭘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사람인 이상 정신적 가치관이나 철학, 사회 문화적 유산 혹은 관습에서 내려오는 자녀 양육 방식을 따르는 게 당연하건만, 저는 왠지 우리나라 부모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는 없는 ‘생태적 유전자 양육 방식’이 입력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까치와 뻐꾸기와 가시고기의 ‘자연 생태’처럼 말입니다.

 

제 표현과 비유가 어처구니 없나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솔직히 자식키우는 것에 너무 유별나지 않나요. 그러다 보니 엄두가 안나 아예 안 낳겠다는 세태로까지 이르게 된 것 아닙니까.

덧붙이는 글 | 자유칼럼그룹에도 실렸습니다. 


#자녀교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