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배추 값이 만만치 않다. 여러 해 배추 농사를 지어왔지만 올처럼 배추에게 고마워해 보기는 처음이다. 배추가 ‘금추’ 대접을 받다보니 몇 포기를 팔아도 금세 주머니가 불룩해온다. 많은 비로 고추농사 허탕을 치고, 고구마 값이 똥값일 때에 비하면 배추가 이리 고마울 수 없다.

배추 포트 모종을 밭에다 내 옮겨 심자마자 연일 비가 내렸다. 두 달간 맑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해 볕을 볼 수 없으니 배추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배추는 물이 없어도 탈, 많아도 걱정이다. 해마다 물푸기로 생쥐 꼴로 말이 아니더니 올핸 물 많아 걱정이다.

 샛노란 배추 고갱이 속은 어린아이의 이빨을 보듯 풋풋하고 신선하다.
샛노란 배추 고갱이 속은 어린아이의 이빨을 보듯 풋풋하고 신선하다. ⓒ 윤희경


어린 배추 모종들이 비실비실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비가 멈추고 물이 삐면 배추에 좋다는 목초액도 먹여주고 칼슘으로 영양보충도 시켜줬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다. 노균병, 잎마름병, 역병 등이 걸려 흐물흐물 진물러 터졌다. 경험상 배추농사를 포기해야 했다. 나자빠진 어린 생명들을 뒤로 하고 밭둑을 넘어오는데,

“주인장님, 여기서 포기하시게요.”
“그래, 이젠 햇볕을 기다리기엔 지쳤다.”

“속는 셈 치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시지요.”
“속아보라고, 누굴 놀리는 거야.”

그때였다. 햇살 한 줌이 등 뒤에 내려와 속삭거렸다. “주인님, 곧 비를 멈추고 햇살을 보내드릴게요, 약속드려요” 하는 것이었다.

 김장 담그는 시골 아낙들, 김장도 품앗이다.
김장 담그는 시골 아낙들, 김장도 품앗이다. ⓒ 윤희경


그랬다. 신기하게도 구월 어느 날부터 비가 멈추고 따사로운 햇살이 ‘쨍’ 쏟아지기 시작, 배추가 살아나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환희와 축복된 순간이었다. 매일처럼 배추와 교감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하루가 다르게 팽팽 속을 채우고 통알 가지로 배가 불룩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배추 값이 치솟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금추’로 둔갑하다니, 아 대견한 배추.

배추를 사러 온 단골손님들께 인심을 푹푹 써가며 덤을 듬뿍 안겨준다. 삼십 포기면 다섯 포기 더 주고, 백포기면 이십 포기 얹어 주고, 이백 포기면 무는 서비스로…. 즐거운 순간이다. 귀할 때 인심을 써야 세상이 행복하고 살맛이 난다.

 배추 보쌈 소엔 생새우와 생굴이 들어가야 제맛
배추 보쌈 소엔 생새우와 생굴이 들어가야 제맛 ⓒ 윤희경


해마다 농사는 짓되 고추농사로 벌어들인 몫은 집사람 것이고, 배추 수입은 내 것으로 묵언의 약속이 돼 있다. 그러나 올해 고추농사는 많은 비로 초장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고추 대를 거두어 태워버린 지 오래다.

집사람의 호주머니가 허하고 시리다. 말은 안 해도 불룩한 내 속주머니에 슬쩍슬쩍 눈짓을 준다. 배추 값이 쏠쏠했으니 허한 빈주머니를 조금 채워줬으면 하는 눈치다. 그 때마다 시치미를 떼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기분이 이리 고소할 수가 없다.

 오지 항아리에 김치가 곰삭고 있다.
오지 항아리에 김치가 곰삭고 있다. ⓒ 윤희경


어젠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우리 집 김장을 담갔다. 시골 살림은 김장도 품앗이다. 생강, 고춧가루, 마늘, 파, 무채, 소금들이 바서지고 다지고 잘려 김치 소가 만들어진다. 거기에다 시골냄새까지 함께 버무리면 소가 빨갛게 물들어간다.

소 사이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청 갓과 쪽파 내움에 침이 꼴깍 고여 온다. 소를 다져 속을 채우고 배추 잎을 똘똘 말아내는 아낙들의 손놀림과 피어나는 웃음소리에 동짓달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오늘 따라 고갱이 보쌈 맛이 이리 달 수가 없다.

김치 담는 광경들을 바라보니 나의 분신들이 다 모여 있다. 무, 배추, 고추, 마늘, 쪽파 등 여름내 땀 흘려 길러낸 것들이다. 참살이 채소들을 손수 키워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다.

 미리 꺼내 본 김장 한 포가지...겨우내 밥도둑이 될 듯.
미리 꺼내 본 김장 한 포가지...겨우내 밥도둑이 될 듯. ⓒ 윤희경


올해 배추가 이리 효자노릇을 할 줄은 몰랐다. 배추 값이 좋아 속주머니가 불룩하니 겨울이 닥쳐와도 조금도 춥지 않다. 내일은 그동안 김치 담느라 손이 시리고 주머니가 허허한 집 사람에게 빳빳한 배추 색 신권 봉투나 넣어줘야겠다. 이런 의미에서 난 올 겨울 내내 남편으로서의 존경과 왕 대우를 톡톡히 받을 걸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입력하시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김장#김장#배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