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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를 풀어주시겠소?”

“내가 잡고 있는 것이 아니네. 나 역시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운중이 백도에게 시선을 돌리자 백도는 잠시 보주를 바라보더니 용추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용추가 쓰러질 듯 상만천 쪽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고생했네. 이제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렸군.”

어차피 최악의 경우는 각오했다. 결국 그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용추는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결과가 눈에 보인다. 모든 것은 끝났다. 상만천이 운중을 보며 나직하게,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승부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이 어떻소?”

“같은 생각이네. 허나 그 뒤에 대한 우려는 하지 말게. 자네가 승리한다면 자네가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데리고 나갈 수가 있고 아니, 이 운중보마저도 자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걸세. 더 이상 아무도 자네를 막거나 성가시게 않을 것이네.”

말과 함께 운중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이 승부로 모든 것을 결정짓되 그 승부 후에는 누구도 나서지 말라는 의미다.

“자네가 나를 이기면 자네가 얻고 싶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네.”

못을 박듯 확연한 대답이다. 또한 모두 들으라는 대답이었다. 이것은 운중의 약속이었다. 문제는 능효봉이었다. 명색이 보주라지만 운중의 말을 어길 사람은 이 안에 아무도 없다. 다만 능효봉은 구룡의 후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용서를 하지 않겠다면 운중으로서도 말릴 수 없는 노릇. 허나 능효봉은 고개를 끄떡였다. 

“보주의 약속에 동의하겠소. 허나 저 자는 안 되오. 저 자는 제 몫이오.”

추산관 태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중보에서 발생한 오일간의 큰 사건을 종식시키는 두 차례의 승부가 운중각의 뒤뜰에서 이루어졌는데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조용히 끝났다. 어차피 두 건의 승부는 애당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할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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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삼 개월이 지났다. 처음 운중보에 들어왔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풍철한과 함곡은 현무각(玄武閣)의 이층에서 운중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중보는 과거와는 달리 매우 조용했다. 시각이 이른 탓인지 움직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참석해야겠지?”

함곡이 손에 쥔 청첩을 다시 훑어보며 물었다.

“망할 놈의 늙은이! 아주 목줄을 틀어쥐고 꼼짝을 하지 못하게 하는구만. 아주 시기적절하게 날짜도 잡았어. 쩝.”

풍철한이 투덜거렸다. 기껏 준비한 회갑연도 마다하고 서둘러 떠나버린 한 늙은이에 대해 삼개월 내내 하던 욕이었다. 그러고는 이제 기껏 한숨을 돌릴 만하니까 설중행과 우슬의 혼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청첩을 덜렁 보내왔던 것이다. 거기에 아주 달콤한 유혹도 곁들여서 말이다.

“고생 많았네. 운중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거야.”

“알기는? 뒤처리나 하라고 허울 좋은 보주자리를 물려주고 자기는 지금 손자나 안을 생각에 여념이 없을 걸?”

“그러면 왜 죽이라고 하지 받아들인 건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니면 정말 죽이겠던데? 그러는 자네는 왜 나와 같이 있겠다고 동의했나?”

“나야 인질 아닌 인질(?)을 가지고 위일천이 공갈과 협박을 하는데 별 수 있었겠나?”

함곡의 부인을 위일천이 운중선에 보호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위일천은 은근히 함곡에게 협박 아닌 강요를 했던 것이다. 풍철한과 함께 운중보를 맡아달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지. 동생들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야. 운중께서는 불쑥 자네에게 이 운중보를 맡긴 것이 아니란 생각이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자네만한 적임자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어.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게. 모든 뒤처리까지 아주 순조롭게 끝나지 않았나?”

숨을 죽이고 있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육파일방의 인물들은 보름 후에나 운중보를 나갈 수 있었다. 용추와 상만천의 두 딸도 마찬가지였다. 회는 붕괴되었다. 허나 운중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떠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약은 늙은이가 이미 모든 계산을 마치고 나를 끌어들인 것 아니겠나?”

함곡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자네를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끌어들이지 못했네. 하지만 자네를 끌어들인 것은 필시 운중 그 분이었을 거란 생각이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결과를 처음부터 예측하고 만든 사람이 그 분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모든 결과가 그렇게 확신하게 만들고 있네.”

그 점에 있어서는 풍철한도 인정해야 했다.

“끝까지 참는 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자기가 할 일은 모두 마친 분이야.”

“그렇지. 추태감의 무공도 놀라웠지만 정말 상만천이 펼친 금룡의 금강단혼수는 무섭더군. 일개 상인의 몸에서 그런 절기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아마 나라면 당했을 수도 있었네.”

운중과 상만천의 대결은 백오십 초가 넘는 오랜 승부였다. 모두 긴장한 가운데 그들의 승부를 지켜보았지만 십여 초가 지나기 전에 의외의 결과를 기대하는 인물은 없었다. 운중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아주 자세히, 그리고 무학의 이치를 세세하게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진기의 운용부터 물이 흐르는 듯한 신법과 보법의 공부와 공수(攻守)의 적절한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리(武理)였다. 운중은 제자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백오십 초를 넘기는 가운데 운중이 공격한 것은 단 두 차례뿐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정확했고 치명적이었다.

“세인들을 놀라게 했지만 상대가 운중 그 분이었던 것이 상만천의 마지막 실수였지. 그 분이 그러지 않았나?”

'금강단혼수의 초식은 아주 완벽하게 익혔군. 허나 구룡의 무공은 구룡의 혼이 담겨 있어야 완벽해지지. 혼이 담기지 않은 구룡의 무학은 그저 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망할 놈의 늙은이는 무신(武神)이야. 그것 때문에 내가 끽소리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 아닌가?”

“그럼 어떤가? 자네같이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 이 큰 운중보를 얻지 않았나? 지금이야 조금 답답하기는 해도 어떤가? 더구나 이번 청첩에 보니 자네에게 더 큰 것을 안겨주려 하는 것 같던데?”

함곡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풍철한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도 아주 묘한 은근함이 깃들어 있었다.


#천지#추리무협#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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