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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상처가 더 크다

 

강상인을 세종이 있는 본궁으로 보낸 태종은 우부대언(右副代言) 원숙과 도진무(都鎭撫) 최윤덕을 불러 임금에게 선지(宣旨)를 전하라 명했다.

 

“내 일찍이 교서를 내려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하겠노라고 말했다. 헌데 병조는 궁정 가까이 있으면서 순찰에 관한 일만 내게 아뢰고 그 밖의 일은 모두 아뢰지 않았으니 내가 군사를 듣기로서니 무엇이 사직에 도움이 되겠느냐?

 

또한, 강상인에게 벼슬시킬 만한 사람을 적어주며 주상께 올리라 하였더니 강상인은 자기의 아우 강상례를 더 적어 사직(司直)의 벼슬을 내리게 하고는 내게 와서 사례하기를 ‘주상께서 신의 아우 상례로써 사직을 삼으셨나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속인 것이다.”

 

태종의 노기는 불꽃 같았다. 세종에게 선지를 전한 태종은 병조참판 강상인과 병조좌랑(佐郞) 채지지를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하고 의금부제조 유정현을 불렀다.

 

“이런 의논을 먼저 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라, 만일에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거든 고문을 가해도 좋다.”

 

피바람을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었다. 상왕의 심기를 건드린 병조는 바짝 엎드렸다. 태종은 환관 노희봉에게 군사(軍事)를 점검하게 하고 지병조사(知兵曹事) 원숙으로 하여금 병조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병조를 접수하려는 태세다. 흐트러진 군기를 다 잡기 위한 병조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상왕을 허수아비 만드는 병조를 초토화 시켜라

 

강상인을 의금부에 투옥한 태종은 뒤이어 병조판서 박습, 참의(參議) 이각, 정랑(正郞) 김자온·이안유·양여공, 좌랑(佐郞) 송을개·이숙복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했다. 병조 싹쓸이 작전이다.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과 차관 그리고 국장급들이 줄줄이 투옥되었으니 병조가 초토화된 셈이다.

 

고삐를 틀어쥔 태종은 형조판서 조말생, 대사헌 허지, 우사간 정상을 위관(委官)으로 임명하고 호조참판 이지강으로 하여금 잡치(雜治)하도록 했다. 위관은 오늘날의 재판장이다. 또한 도진무 최윤덕에게 의금부에 가서 안문(按問)하도록 했다. 국문에 준하는 형옥이 시작된 것이다.

 

병조의 관리들을 신문하던 의금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강상인과 낭청(郞廳) 6사람을 모두 고문하였으나 사리를 잘 살피지 못했던 탓이라고 변명합니다. 박습과 이각도 함께 고문하도록 윤허해소서.”

 

“박습은 재임한 날짜가 얼마 안 되니 그대로 두고 강상인은 젊어서부터 나를 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직임을 맡겼거늘 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거짓으로 속일 마음만 품었으니 그 죄가 중하다. 마땅히 단단히 고문을 하되 죽지 않을 한도까지 하라.”

 

박습은 태종의 과거 동방(同榜)이다. 문과에 응시하여 7등으로 턱걸이할 때 같이 합격한 동료다. 옛날을 생각하여 박습은 봐주고 강상인은 괘씸죄를 걸라는 것이다.

 

믿었던 가신이 배신하다니... 괘씸했다

 

강상인은 태종의 잠저시절 가신(家臣)이었다. 올곧은 성격으로 태종의 신임을 받아 즉위와 동시에 생원으로 발탁되었다. 공직에 있으면서 청렴성을 인정받아 본궁(本宮)의 사재(私財)를 출납하는 일을 감독하는 일도 겸직했다. 무한한 신뢰를 보냈던 강상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강상인에게 형문을 가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태종은 박습과 강상인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 용서하여 면죄하고 강상인은 그의 고향으로 귀향조치 했다. 이각·양여공·이안유·김자온·송을개·이숙복·채지지를 속장(贖杖)에 처하라 명한 태종은 태상왕 및 임금과 더불어 의건(義建)과 삼군(三軍) 양부(兩府)의 군사들을 친히 검열했다.

 

무차별 공습을 당한 병조에서 상왕전으로 보고가 올라왔다.

 

“앞으로는 중외(中外)의 군무를 병조에서 상왕께 아뢰어 선지(宣旨)를 받아 행(行)한 후에 사실을 갖추어 임금께 아뢰기로 하옴이 좋을까 하나이다. 또한 모든 수점(受點)의 절차는 상왕께 미리 아뢰어 수점을 마친 후에 임금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병조가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육조에서 2품 이상의 사람을 쓸 때, 세 사람의 이름을 적어 올리면 임금이 그 가운데서 마땅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 내려보내는 것을 수점(受點)이라고 한다. 3품 이하 제거(提擧)·별좌(別坐)·경차관(敬差官)과 같은 직책은 임금의 수점을 거치지 않고 구두로 보고하여 구두로 윤허 받는 것을 구전이라고 한다.

 

병조의 주청을 가납한 태종은 황룡대기(黃龍大旗) 2개를 만들어 의건부(義建府)와 삼군부(三軍府)에 나누어 걸도록 했다. 상왕전의 큰 기(大旗)는 흰 바탕에 황색 선을 두르고 황룡(黃龍)을 그려서 주상전의 기와 차별화한 것이다. 군권은 상왕전에 있으니 군대는 일사분란하게 따르라는 것이다.

 

병조를 평정한 태종에게 형조판서 김여지, 대사헌 허지, 좌사간 최개가 합동하여 상소를 올렸다. 박습과 강상인을 죄 주자는 것이다. 태종이 상소를 물리치자 삼성(三省)에서 다시 박습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청했다.

 

“신하의 죄는 불경(不敬)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불경의 행실로는 임금을 속이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사온데 박습과 강상인이 병조에 직임에 있으면서 군무에 관한 일을 한 번도 상왕께 아뢰지 않았으니 이는 불경함이 분명하옵니다. 상왕께서는 박습·강상인이 원종공신이라 하여 죄를 면하여 주는 것은 공의에 어긋나오니 그들의 직첩을 거두시고 법률에 의하여 죄를 주어 불경함을 징계토록 하시옵소서.”

 

태종은 강상인을 함경도 단천의 관노(官奴)에 붙이고 박습은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 보내라 명했다. 또한 이각은 전라도 무장(茂長)으로, 김자온은 경상도 양산으로, 양여공은 경상도 함안으로, 이안유는 경상도 경산으로, 채지지는 전라도 고부로, 송을개는 경상도 칠원(漆原)으로, 이숙복은 평안도 강동으로 유배 보냈다.

 

영광이 화(禍)가 되어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병조의 군기를 다 잡은 태종이 좌의정 박은을 불렀다.

 

“심온은 국왕의 장인이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마땅히 영의정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좌차(座次)는 두 정승과 상의하도록 하라.”

 

“마땅히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의 위에 두어야 할 것이옵니다.”

 

한상경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심온이 임명되었다. 전격 발탁이다. 세종의 장인 심온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된 것이다. 청송 심씨 집안에서 왕비가 나오고 영상이 나왔으니 가문의 영광이다. 태종 이방원과 심온의 인간관계는 보통 이상의 특별한 사이였다.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을 지낸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함께 회군한 사이였다. 조선개국 후 심덕부는 이성계의 딸 경선공주를 며느리로 삼았다. 심온 자신은 세종의 장인이 되었으니 겹사돈 관계다.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위한 환송연이 양정(涼亭)에서 베풀어졌다. 사은사 구성은 변함이 없었으나 주문사는 김여지가 빠지고 찬성사(贊成事) 박신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연회가 파할 무렵 태종이 심온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했다. 영광의 선물이다. 허나,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하였던가? 이 영광이 화(禍)가 되어 가문의 몰락을 가져왔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태그:#의건부, #황룡대기, #삼군부, #박습, #강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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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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