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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을 달래는 바라춤

고광순 의병장 원혼을 달래는 바라춤
 고광순 의병장 원혼을 달래는 바라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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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일, 음력 9월 11일) 11시, 피아골 연곡사 경내에서는 한말의병장 녹천 고광순 의사 현장 추모제를 겸한 녹천순절비를 새로 단장한 고유제가 열렸다.

의병장고공광순순절비
 의병장고공광순순절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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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녹천 고광순 의병장이 1907년 9월 11일(음) 순국하신지 만 100년이 되는 날로, 바로 당신이 동백나무 그루터기를 부여잡고 붉은 피를 쏟으며 목숨을 나라에 바친 그 자리에서 추모제를 겸한 녹천순절비 정화 고유제가 구례군민 주관으로 조촐히 열리고 있었다.

고유제에 앞서 녹천 고광순 의병장의 원혼을 달래는 바라춤이 있었다. 100년 전, 일본군이 녹천을 향해 총을 쏘던 바로 그 지점에서 고수의 북소리에 따라 바라춤 기능 보유자 장은정씨의 긴 소매가 총알이 날아간 빈 공간을 살포시 가로 휘저었다. 

곧 이어“1958년 2월, 구례군민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순절비를, 공의 순국 101주년을 맞아 순절비 언저리를 새로 단장하는 정화사업을 끝냈다”는 고근석 구례부군수의 고유문 낭독에 이어, 녹천 고광순의사 기념사업회 고재춘 회장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독립기념관 박민영 연구위원은 추모 강연에서 녹천이 의병전선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첫째 일제의 극심한 경제 침탈을 좌시할 수 없었고, 둘째는 을사늑약 후 고종황제의 밀칙이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임진왜란 순국 의병장 직계 후손으로 그 소명을 다하고자 함”이라며, “지리산 피아골 단풍의 강렬한 빛깔은 바로 녹천의 핏빛이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콩 심은데 콩이 나다

녹천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나라를 구한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의 12대 사손(祀孫;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다. 그의 집안에 함께 의거(義擧)를 일으킨 사람은 고제량(高濟亮)과 고광훈(高光薰) 고광수(高光秀) 고광채(高光彩)가 있다. 이처럼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항일 투쟁의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상월정(上月亭)에 올라가 10년 동안 문을 닫고 심력을 다하여 학문을 익힌 뒤 과거에 응하였으나 부정이 심하여 관직을 외면하였고, 집안도 10대 종가이나 가산이 변변치 못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상경하였을 때 당시 집권자 민응식(閔應植)이 그를 보고서 수석을 약속하였으나 관서 사람이 돈 일백만 냥을 뇌물로 바쳐 중도에 변경시켰기 때문에 고광순은 낙방하였다.

고광순은 민응식을 찾아가 "대감이 돈 일백만 냥에 국사를 희롱하니 참으로 한 푼 가치도 없는 인물이구려. 내 어찌 세도가의 이용물이 되겠는가? 내가 망령이다"하고 옷소매를 떨치고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구례군 고근석 부군수가 순절비 앞에서 고유제를 드리고 있다.
 구례군 고근석 부군수가 순절비 앞에서 고유제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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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과감하게 항일 의병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제천 의병장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의 격문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는 가운데, 호남에서는 장성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 창평의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洵)과 나주의 이학상(李鶴相) 등이 상호 연대를 결의, 1896년 병신 2월 그믐날 광산부 광산관(광주향교)에 집결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송사(奇松沙)의 지휘 하에 장성을 거쳐 정읍까지 진격하였을 때, 조정으로부터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고종의 해산칙령을 가지고 와서 해산을 명하자, 기송사가 황제의 영을 거역할 수 없다 하여 순순히 파병(罷兵; 군사를 흩음) 결정을 내리므로, 하는 수 없이 거의(擧義)의 뜻이 꺾이고 말았다.

의병을 일으킬 생각만 하다

녹천기념사업회 고재춘 회장의 경과보고
 녹천기념사업회 고재춘 회장의 경과보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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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해산 뒤 고광순은 비분강개하여 국치(國恥)를 씻고자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만 하였다. 그는 숨어 다니면서 영남 호남으로 출몰하여 백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면암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면암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과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아 오고자 떠난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래도 고광순은 좌절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12월 11일(양 1907년 1월 24일) 고광순은 고제량과 더불어 창평 저산(猪山) 분암(墳庵)에서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그 진용은 주장에 고광순, 부장에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고광문(高光文) 박찬덕(朴贊德), 호군 윤영기(尹永淇), 종사 신덕균(申德均) 조동규(曺東圭) 박병선(朴炳善=朴外東) 김응삼(金應三) 박주일(朴周逸) 조규현(曺奎鉉) 김현섭(金顯燮) 이항선(李恒善) 등이었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유격전술을 써서 조석으로 변장하고, 어제 동쪽을 쳤다면 오늘은 서쪽을 치고, 밤낮으로 진지를 바꾸는가 하면, 구름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며, 치고 빠지기를 번개같이 하는 바람에 일군들은 이러한 유격전에 시달리고 지친 끝에 아예 고광순 부대의 뿌리를 뽑아버릴 요량으로 녹갈재 밑 녹천 본가(고씨종택)에 불을 질러버렸다.

'불원복기'
 '불원복기'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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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잖아 광복이 된다

독립기념관 박민영 연구위원
 독립기념관 박민영 연구위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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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은 본가가 불타고 벙어리 아들 재환이 일군의 칼에 마구 찔리고 가솔이 오갈 데 없이 되었다는 소식에 더욱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태극도안 위에 “불원복(不遠復: 머잖아 광복이 된다)”이라는 세 글자를 크고 단정하게 써 넣은 ‘불원복’기를 고안하여 군기로 사용하였다.

“‘불원복’이란, 머잖아 반드시 광복이 될 것이니 용기를 내서 싸우자”며 군사들을 고무 격려하매, 장졸들은 아침저녁으로 이 국기 겸 군기에 절하면서 국권회복을 염원하며 죽기를 맹세하고 싸웠다.

녹천 의병부대는 능주 양회일 의병부대와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의병부대 등과 제휴하여 게릴라 연합전술로 능주와 동복을 공략하는 등, 인근 고을을 넘나들며 기습을 거듭해 보았으나, 훈련받지 못한 비정규군에 빈약한 무기와 부족한 군량 등의 악조건으로는 최신의 무기를 갖춘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관군과 일군들이 의병의 근거지를 겨냥하고 차츰차츰 죄어 들어오는 기미가 보이자 마침내 고광순은 전략을 바꾸어 지난날 영호남을 왕래하며 보아 두었던 지리산의 심산유곡으로 본진을 옮기고 일군을 그곳으로 유인할 계책을 세웠다. 

추모제 참배객
 추모제 참배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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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고광순은 1907(정미)년 8월 4일(음) 유시(酉時: 오후 8시)에 월봉산 국수봉을 향하여 신명께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진용을 다시 정비하여 자신은 도독(都督)이 되고, 고제량은 도총(都摠), 박성덕(朴聖德)은 선봉장, 윤영기 신덕균을 참모로 삼아 이튿날 지리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들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당도한 때는 추석을 나흘 앞둔 1907년 8월 11일(음) 오후였다. 1895(을미)년 거의(擧義) 이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세우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달려온 세월의 종착지가 바로 이곳임을 직감한 고광순은 비장한 각오로 다가올 결전의 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315년 전, 선조 고경명(高敬命) 종후(從厚) 인후(因厚) 세 부자(父子)가 의병으로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것처럼 당신도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장렬히 산화할 것을 이미 월봉산 국수봉에 맹세한 바 있지 않은가.

지리산 연곡사 대법당인 대적광전으로, 임진왜란에 이어 구한말 의병 근거지로 일제에게 다시 불태워진 수난의 절이다.
 지리산 연곡사 대법당인 대적광전으로, 임진왜란에 이어 구한말 의병 근거지로 일제에게 다시 불태워진 수난의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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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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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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