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화집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 표지
동화집<태진아 팬클럽 회장님> 표지 ⓒ 푸른책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인터넷 노인복지 학습모임인 <어르신사랑연구모임> 오프라인 공부방에는 말 그대로 다양한 회원들이 모인다. 직업, 연령, 경력, 참여 동기 모두 백인백색이다.


언젠가 올해 69세 되신 여자분이 참석을 하셨는데, 외모나 옷차림으로는 그 연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분이셨다. 공부방 진행을 맡은 회원의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이나, 혹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동시에 자기 소개를 하는 순서였다.


'오늘 처음 참석한다'며 닉네임은 * * *, 이름은 정OO라고 소개를 하시더니 공부하고 난 소감에 이어 외손녀 이야기를 꺼내셨다.


"다섯 살짜리 외손녀가 글쎄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긴 줄 알더라니까요. 늙어서 이렇게 된 줄은 모르고, 어렸을 때부터 머리는 하얗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어요!"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에 생각이 미쳐서일 것이다.


동화집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에 실린 동화들은 노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 선입견을 깔끔하게 깨뜨리면서 이 시대 노인의 문제를 섬세하게 짚고 있다. 이전에 노인과 노년의 삶을 담은 동화들 대부분이 다루던 병든 노인 돌보기, 괴팍한 노인과 만나 소통하기,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 듣기의 단순함에서 성큼 한걸음 앞으로 내딛고 있다.


<버럭 할배 입 속엔 악어가 산다>는 '잔소리꾼, 참견쟁이' 동네 할아버지 입 속의 틀니를 '악어'로 생각하는 어린아이 이야기다.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할아버지도 가까이 대하고 눈을 맞추면 웃음이 있고, 다정함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저절로 알아간다.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은 한마디로 할머니의 독립선언서이다. 평생 남편과 자식들 그늘에서 묵묵히 일만 하고 의사 표시도 제대로 하는 법이 없던 할머니가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실천에 옮긴다.


식구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특히 할머니의 말 없는 노동과 돌봄에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크게 거부감을 보인다. 뒤늦게 운전면허증을 따고, 양파링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가수 태진아 팬클럽 회장이 되고, 보육원 아이들을 방문하는 할머니의 변신은 놀랍고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촉촉하게 다가온다.


거기다가 할머니의 변신을 응원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결국은 받아들이는 할아버지에 이르면, 할머니도 감정이 살아 있고 자기 의지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차라리 늙기 전에 죽을래요!'를 외치는 아이들에게 어쩜 가장 소중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 시집간대요>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할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게 되어 아들네로 오신 할머니. 동네 꽃집 할아버지와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다가 서로 남은 시간을 의지하기로 어렵게 마음먹지만, 자식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 '노인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하는 젊은 사람들의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이 든 가슴은 가슴이 아니며, 나이 든 감정은 감정이 아닐까. 자식들이 도저히 채워줄 수 없는 노인들 가슴 속의 빈 자리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 리 없는 노년의 사랑과 연애와 재혼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소중한 작품이다.


<개구리 이마에도 뿔이 날까>는 치매 할머니의 스카프가 화자(話者)다. 전처 자식들을 애지중지 길렀지만, 치매 걸린 어머니는 자식들 모두에게 짐이다. 옆에서 수발하는 할아버지만 애가 끓는다. 가장 속 썩였던 아들이 그래도 뒤늦게 어머니 마음을 헤아렸기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강 다리에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신다. 얼마나 다행인지.


<수제비>는 홀몸 노인(독거 노인) 이야기다. 자기들 살기에 바빠 들여다보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귀에는 전화벨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비오는 날 자식들과 함께 먹던 생각이 나 부침개를 만들려던 할머니는 깜빡하고는 수제비를 끓인다. 자식들 목소리까지도 환청으로 들리는 혼자 사는 할머니의 뼛속 깊은 고독이 어둡게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차분하고도 따뜻하게, 그러나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맞다. 다섯 살짜리 아이 눈에는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설 살짜리가 아니지 않은가. 나이 듦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나만은 해당사항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오늘을 산다. 물론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늙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노인복지 현장에서 일하면서 '세대별 노년 이해 교육'의 꿈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데, 어린이들에게는 이렇게 진화하는 동화책들이 아주 좋은 교재가 될 것 같아 내가 괜히 뿌듯하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동화집이다.

덧붙이는 글 |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 (이용포 동화집, 한지선 그림 / 푸른책들, 2007)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

이용포 지음, 한지선 그림, 푸른책들(2007)


#동화 속 노년#노인#노년#동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