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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 밤 10시에 기차를 탔다. 기차역은 이름도 멋진 람세스 역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역쯤 되겠다. 지역 이름을 사용하는 것보다 특이하고 의미 있는 것 같다.

 

기차역에서도 역시 읽을 수 없는 표를 들고 장님인 것처럼 멀뚱멀뚱. 결국 이집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숫자는 조금만 생각하면서 보면 읽을 수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디서 타는지, 몇 호차인지 알 길이 없다.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춥다는 생각을 하면서 담요를 덮었다. 오전 9시가 되어서야 룩소르에 도착했지만, 어떤 방송도 해주지 않았다. 알아서 내려야 하는 생존 기차인 것이다.

 

룩소르의 첫인상은 참 좋았다. 조용히 흐르는 나일강이 만드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도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나간 곳은 숙소 뒤에 있는 시장이었다. 이집트어로 ‘수크’ 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냥 잠시 둘러보면서 포도를 사고 햇빛을 가릴 중간 크기의 천을 하나 샀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숙소에 들어갔다 다시 사진기를 들고 시장에 갔다. 나일강에서 잡은 물고기들과 물고기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는 아저씨, 여러 야채들과 과일들, 고기들이 널려있는 정육점과 뼈를 발라내고 있는 아저씨, 온몸을 가리는 검은 차도르를 쓰고 시장에 나온 얼굴을 보기 힘든 이집트 여자들, 그 모든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다.

 

마구잡이로 놓은 과일도 어찌나 아름답던지 괜히 장사하시는 분에게 말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이집트어를 정리해 놓은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못하는 이집트 말을 남발하면서 환심을 산 뒤 여기 저기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포즈도 참 잘 취해준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뿌듯한 마음으로 왔는데 그 필름이 날아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 속쓰림이란!

 

관광지가 아닌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나에게 아주 힘든 일이다. 눈치도 보이고 '혹시 괜히 잘못 들이대면 싫어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과감하게 찍지도 못한다. 그렇게 온갖 눈치를 보고 귀여움을 떨면서 힘들게 찍은 사진이 다 날아갔다니! 사진기란 허망한 것이다. 눈에 담아 놓을 걸, 마음에 담아 놓을 걸. 꼭 그렇게 티 내고 다니면서 왜 찍었을까. 차라리 그냥 그곳에 앉아서 그들과 더 친해질 걸. 그러면서도 또 포기 못하는 사진에 대한 욕심은 도대체 무얼까?

 

예전에도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을 날렸던 적이 있었다. 아쉬워서 몇 날 며칠 밤 잠을 설쳤다. 나는 그 서운함을 삭이다 못해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 작은 시장을 위해 나는 다시 이곳에 올 것이다. 어쩌면 이 작은 시장이 나보고 다시 오라고 마수를 부린 것일 수도 있다. 고맙다 시장아! 다시 올 동기를 부여해줘서.

 

시장에서 나오는 골목은 이집트인 삶을 닮아 있었다. 포장 안 된 길 사이로 빼곡히 들어앉은 누런 집들 사이사이 그늘엔 몇몇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앉아 있었다. 시동을 걸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차도 구석에 서 있었다. 2~3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조그만 이발소와 구멍가게에는 조용한 정적만 흐른다.

 

한 아이가 플라스틱 통과 캔 같은 고물을 줍고 있다. 이 더운 한낮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몇 개 되지도 않는 고물들을 줍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장에서 사온 망고 하나를 건네 주었다. 볼펜 하나 주면서 공부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한참 동안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화려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힘들고 고달퍼 보인다.

 

시장에서 산 천을 머리에 두르고 밖에 나가니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숙소 옆 가게 아저씨는 더 친하게 말을 건네면서 살 것 없어도 놀러 오라고 했고 밥 먹으러 간 곳에서는 예쁘게 매는 법을 알려줬다. 어떤 경찰은 갑자기 이슬람을 믿냐면서 친하게 다가온다.

 

가격이 얼마 안 하는 이 천 하나가 햇빛도 가려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과 연결해 준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하긴 외국사람이 한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본다면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름도 다시 매주고 옷맵시도 잡아주면서 친근감을 표시할 거다.

 

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 그들이 입는 옷을 입는 것, 그들이 하는 언어를 따라 해보는 것 등. 이런 쉽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서로의 관계에 윤활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다. 그 단순함 속에 답이 있다.

 

해질녘 룩소르는 다시 한 번 변신을 한다. 뜨거운 태양이 사라지고 나면 조용하던 동네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누렇기만 하던 색이 사라지고 나일강 옆 룩소르 사원에 빛이 들어온다. 조명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보여주기 싫은 모습은 어둠에 숨기고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강조해서 보여주니 말이다. 그래서 밤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힘들고 고달픈 삶의 자국들은 감춰주고 잠시 동안 그것을 잊게 해준다.

 

시원한 바람을 쏘이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일강가로 모여들고 펠루카(이집트 나일강에서 탈 수 있는 배)를 타라고 호객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강 저편으로 떨어지는 해는 펠루카의 돛에 걸려 있다. 그 모습이 가슴 저리게 아름답다. 고요한 나일 강은 그저 조용히 흐를 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렇게 장엄하게.

 

저 멀리 말과 마차를 타고 오는 무리들이 보인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나타난 긴 행렬이다. 결혼식이라고 한다. 시원한 저녁부터 이렇게 결혼식이 시작된다고 한다. 나일 강가는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고달픔은 어둠에 맡겨버리고.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다녀온 이집트 여행기입니다.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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