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시험문제를 풀어주고 점수를 확인해준 뒤에 시계를 보니 20여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because'와 'so'를 사용하여 간단한 영어문장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준 뒤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해 학교 축제 주제가 뭔지 아세요? '내가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아름답다면 어떤 점이 아름다운지 10가지만 적어보세요.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어요. 선생님이 보기에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아름다워요. 물론 아름답지 못한 부분도 많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어요.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자신의 단점을 알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점들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키워가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여러분이 학생으로서 성실하지 못한 것도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아름다운 이유 10가지를 적어보세요. 영어로 적어도 좋고, 그것이 어려우면 우리말로 적어도 좋아요."   

10분쯤이 지나서야 아이들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침묵의 10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름다운 이유를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다니? 하지만 나는 곧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줄 사람은 바로 교사인 내가 아니던가. 나는 곧 아이들에게 침묵을 깰 수 있는 열쇠를 던져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솔함'과 '상상력'이라는 두 단어였다.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에 돌아와 아이들이 적어낸 내용을 읽어보다가 몇 번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35명의 아이들이 적어낸 350개의 이유가 나름대로 다 그럴듯했다. 그중에서 영어문장과 우리말 문장 베스트 10을 각각 골라보았다. 

내가 아름다운 이유 10가지
(The 10 reasons why I am beautiful)

영어문장 베스트 10

1. Because I am alive.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2. Because I am not alone. (나는 혼자가 아니라서 아름답다.)
3. Some people love me, so I am beautiful.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아름답다.)
4. Because I am young (나는 젊어서 아름답다.)
5. Because I have passion.(나는 열정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6. Because I enjoy my life (나는 내 인생을 즐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답다.)
7. Because I am a Korean. (나는 한국인이라서 아름답다.)
8. Because I have family. (나에게 가족이 있어서 내가 아름답다)
9. Because sometimes I try to help others.(가끔 남을 도우려 하기에 아름답다.)
10. Because I don't have big problems.(나는 사고 친 경험이 없어서 아름답다.)


우리말 문장 베스트 10

1. 나는 개념이 없다. 개념이 없는 만큼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름답다. 2. 나는 뼈가 있어서 아름답고 그 뼈로 공격할 수 있어서 아름답다.
3. 나는 표현하는 것은 못하지만 표현 못하는 답답함이 아름답다.
4. 내 이름은 정석이다. 내가 있기에 수학의 정석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답다.
5. 내가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하지는 못하지만, 다 하도록 노력해서 아름답다.
6. 한두 번쯤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사람이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7. 나는 고독을 즐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답다.
8.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9. 내 손가락에는 흉터가 있다. 다들 그 흉터를 싫어하지만 나는 그 흉터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내 흉터를 사랑하는 내가 아름답다. 
10. 내가 아름다운 이유를 10가지 쓸 수 있다는 게 아름답다.
  

이 중에서도 내 마음에 꼭 드는 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표현하는 것은 못하지만 표현 못하는 답답함이 아름답다.'
'내 흉터를 사랑하는 내가 아름답다.'

둘 다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사랑이랄까? 아이들은 부족하다. 부족하기에 아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아름답다.


태그:#아름다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