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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마산 여양리와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집단 학살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그곳에서 나온 도장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추적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마산 여양리에서 나온 유골의 모습.
 경남 마산 여양리와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집단 학살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그곳에서 나온 도장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추적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마산 여양리에서 나온 유골의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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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된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도장의 주인을 찾습니다.”

학살된 이들은 누구인지, 왜 학살되었는지 등 숱한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몇몇 무덤에 대한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속에 발굴된 유류품 가운데 관심을 끄는 물건이 있다. 바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보이는 도장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과정에서 도장이 나온 곳은 두 군데.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폐광과 경북 경산시 평산동 소재 코발트광산 학살지다. 공교롭게 이 두 곳을 발굴․조사한 기관은 경남대 박물관.

경남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면서 발굴조사단 책임연구원인 이상길 교수는 그 도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나섰다. 이 교수는 “호적부 등 각종 자료를 들춰봐야 하고,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DNA 검사도 해야 한다”면서 “어렵지만 계속해서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산 코발트광산서 나온 ‘박봉우’는 누구?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지 무덤을 발굴했을 때 나온 유골의 모습.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지 무덤을 발굴했을 때 나온 유골의 모습.
ⓒ 경남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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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는 '박봉우'라고 새겨진 도장이 나왔다. 맨 위 사진은 도장 출토 당시 모습이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는 '박봉우'라고 새겨진 도장이 나왔다. 맨 위 사진은 도장 출토 당시 모습이다.
ⓒ 경남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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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우(朴奉羽).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나온 도장에 새겨진 이름이다. 경남대 박물관 조사단은 ‘박봉우’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추적작업에 나섰다.

조사단은 “이곳에 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박봉우’라는 분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서 “이 자료를 통해 유족 확인이 가능할 것이며, 결국 학살된 민간인의 당시 신분이나 입장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코발트광산사건은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경산․청도지역 보도연맹원을 이곳으로 데려와 학살하고 그 시신을 폐광 내부에 집단 매장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희생자 규모는 3500여구로 추정.

경남대 박물관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지난 6월 25일부터 9월까지 1차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 240여구 이상의 유해를 수습했으며, 탄두와 탄피, 신발, 옷, 단추 등의 유품이 나왔다.

1호 수평갱도 40여구, 2호 수평갱도 120여구, 대원골 80여구가 나왔다. 조사단은 “현재 수습 가능한 모든 유해는 최초 매장 당시의 위치가 아니라 나중에 이동된 것들”이라며 “수직갱도에 매장된 유해가 수평갱도의 한 쪽 부분으로 쏟아져 나온 상태”라고 설명.

조사단이 주목하고 있는 유품이 바로 ‘박봉우’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다. 이는 2호 수평갱도에서 도장집과 함께 나왔다. 길이 3.4cm의 목제 도장이다. 이 도장은 금속 테가 있는 도장집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이 도장 소지자의 유해는 확인이 불가능하였고, 도장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가해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출토품은 소총 탄피와 탄두다. M1 소총은 1950년 당시 정규군이 소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가해자 전체 혹은 그 중의 일부는 정규군인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상길 교수는 “피학살자 1명의 신원이 확인된 셈인데, 그가 왜 거기서 학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추적해 봐야 한다”면서 “특히 경산이나 청도지역에서 ‘박봉우’를 친인척으로 두었거나 한국전쟁 전후에 죽은 사람 가운데 이 이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제보해 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산 여양리 무덤 속 ‘태인 아저씨’는 누구?

 마산 여양리 학살지 무덤에서는 총 148구의 유골이 나왔다. 현재 이 유골들은 경남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마산 여양리 학살지 무덤에서는 총 148구의 유골이 나왔다. 현재 이 유골들은 경남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경남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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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여양리 무덤에서는 '태인'이라고 새겨져 있는 도장이 나왔다.
 마산 여양리 무덤에서는 '태인'이라고 새겨져 있는 도장이 나왔다.
ⓒ 경남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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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泰仁).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폐광에서 출토된 도장에 새겨진 이름이다. 성씨가 없다. 경남대 박물관 조사단은 이 도장의 주인을 ‘태인 아저씨’라 부른다.

2002년 9월 4일 태풍 ‘루사’로 인해 산태골 숯막에 매장되어 있던 유해 일부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산시로부터 의뢰를 받은 경남대 박물관이 2004년 4월부터 6월까지 폐광 내부와 4개의 돌무지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148구의 유골이 나왔는데, 이들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과 진주교도소 수감자들이라는 증언도 있다.

허리띠와 단추, 비닐팩, 동전, 고무줄, 반지, 숟가락, 양복상의, 구두주걱 등이 이곳에서 나왔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유류품이 바로 ‘태인’이라고 새겨진 도장이었다.

이 도장은 폐광 바닥에서 나왔는데, ‘태인 아저씨’ 위에 2구의 유해가 포개어진 상태였다. 엎드린 상태로 있었으며, 오른쪽 팔은 쭉 편 상태이고 왼쪽 팔은 몸에 붙인 상태로 출토되었다. ‘태인 아저씨’는 상의만 입었다. 그 옷 속에서 도장과 함께 젓가락, 구두주걱이 나왔다. 도장 재질은 나무이며 길이는 6cm 정도.

조사단은 ‘태인 아저씨’의 유골을 수습해 신체적 특징을 밝혀냈다. 그는 남자로, 25세 전후(23~27세)로 키는 165cm 정도로 추정되었다. 두개골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치아는 양호한 편이었다.

한때 ‘태인 아저씨’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연극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은 적이 있었다. <진주연극사>에 ‘송태인’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1936년 진주 제2공립보통학교(현 봉래초교)에 입학해 ‘고려예술연구회’라는 극단을 조직해 활동한 인물로 알려졌던 것.

1년간 추적 뒤 2005년 이상길 교수팀은 송태인씨 유족들을 찾아 DNA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그것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두 사람이었던 점과 DNA 분석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점 등의 이유로 ‘태인 아저씨’가 ‘송태인’으로 단정 짓기에는 부족했다.

최근 이상길 교수팀은 ‘태인 아저씨’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교수는 “여러 추적 작업 끝에 ‘태인 아저씨’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냈다. 그는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 아직 DNA검사는 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어 설득 중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도장의 주인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추적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쉽지 않다. DNA검사 등에는 많은 비용도 들어간다”면서 “피학살자의 유족들이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고령으로 시간의 여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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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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