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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네는 그 모든 독성을 중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해약은 만들기 어렵다고 했지. 허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어. 귀찮기는 하지만 그 몇 가지 치명적인 독성을 중화시키기 위해 몇 가지 해약을 만들면 된다는 말까지도 했다네.”

중의 같은 인물이 방법을 찾아냈다면 그동안 무형독의 해약을 만들지 못했을 리 없다. 모두 기대어린 눈빛으로 중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지금 중의의 무형독에 모두 중독되어 있는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자네는 정말 무서운 친구로군.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지금껏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자네만큼은 두려웠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군.”

시인이었다. 부인을 하려 해도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때였다. 성곤이 불쑥 소매에서 알록달록한 녹피주머니 몇 개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조그만 소도도 함께 있었는데 그것은 중의가 환자의 치료에 가끔 사용하는 소도였다.

“운중,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안에 있는 우리는 살 수 있겠군.”

그것을 본 중의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 알록달록한 녹피주머니는 분명 중의가 가지고 다니는 단약이 든 녹피주머니였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성곤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훔친 것이네. 자네는 늦잠을 자지. 더구나 이상하게도 자네는 잠에 빠지면 아주 깊이 빠져든단 말이네.”

훔친 사람치고는 너무나 당당했다. 주작각의 침실에 놓아둔 자신의 행랑 속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언제 저 친구의 손에 가있는 것일까? 같이 주작각(朱雀閣)에서 있었으니 훔치려고 작정했다면 충분한 일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얼쩡거렸다면 경계를 했을 테지만 친구가 훔쳐 가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자네, 장난이 심하군.”

사실 저 녹피주머니는 중의의 전부라고 할 정도다. 아무리 의술과 독술에 능하다 해도 당장 사용할 약이 없다면 처치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고 금방 약재를 구하기도 어렵고, 구했다 해도 만들려면 시간이 촉박할 수가 있다. 더구나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렇게 가지고 다닐 이유도 없다.

“장난? 나는 장난을 한 것이 아니네. 자네가 운중에 대해 두려워하듯 나는 자네를, 아니 자네의 독을 무서워했다네.”

“…”

“나는 언제고 자네가 나나 운중에게 손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네. 특히 이번에는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지.”

농담이 아니었다. 성곤은 웃고 있었지만 눈매는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중의의 얼굴색이 서서히 변했다. 언제나 마음씨 너그러운 친구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인가?

“그것들이 무형독의 해약일지 아니면 독약일지 자네가 무얼 안다고….”

“허허,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네. 자네와 함께 어울리다보니 해약과 독약을 구분할 눈이 생기더군. 해약이라고 보이는 것은 모두 골랐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녹피주머니 중에서 해약으로 쓰이는 것들만 가지고 있다. 중의는 성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친구의 태도는 의외였다. 사소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던 친구였는데 성곤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더구나 저것을 골라서 가지고 있을 정도면 성곤은 이미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말 생각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준비한 것이다. 친구들이라면 모든 것을 양보해왔던 성곤이 그답지 않게 왜 그랬던 것일까?

“돌려주게.”

“자네 같으면 돌려주겠나? 내 목숨 뿐 아니라 여기 여섯 사람, 아니 자네 아들은 빼고 다섯 사람의 목숨을 자네에게 넘겨주라는 말인가?”

성곤의 음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철담이 자신에게 반드시 중의를 죽여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의는 이미 의리나 정 따위는 완전히 망각한 사람이었다. 이젠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사이처럼 느껴졌다.

“자네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해서 해독이 되는 것은 아니네. 무형독을 해독시키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네.”

중의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많은 것 중에서 무엇을 골라 먹는 것이 옳은지는 중의 말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중의와 운중의 대화로 보면 한 알 정도 골라 먹는다고 해서 무형독이 해독될 일이 아니었다.

“자네가 일러주면 되지 않나? 물론 나는 자네가 알려준 대로 그것을 자네 아들에게 먼저 먹여볼 셈이네.”

“자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나?”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네라네. 어찌하겠나?”

무형독을 해독시켜주면 운중이나 성곤이 어떻게 나올지 뻔한 일이다. 이미 성곤은 철담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들 추교학도 이 자리에서 죽을지 모른다.

“내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셈인가?”

“최소한 자네나 자네 아들하고 같이 죽을 수는 있겠지.”

성곤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운중이나 성곤, 그리고 제자 네 명의 목숨과 바꾸는 것은 손해날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포함되지 않을 때의 일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목숨은 아무리 많은 생명과 바꾸라 해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신이 죽은 일을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의가 잠시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리자 성곤이 말을 이었다.

“한 잔 같이 하겠나?”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르더니 운중의 앞으로 술병을 든 오른팔을 뻗어 중의에게 술을 권했다. 중의는 마지못해 술잔을 들고는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며 잔을 성곤 쪽으로 내밀었다. 성곤은 언제나 저랬다.

가끔 고집을 부리다가 그냥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고집을 꺾고 친구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번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성곤까지 어찌해 볼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사람은 친구라도 용서할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내일까지 변수만 없으면 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지금쯤 상만천과 함께 추태감이 움직였을 것이고, 불필요한 존재들을 쓸어버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와 주면 자신은 무사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천지#추리무협#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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