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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윌 헌팅>에서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는 고아 출신 천재 소년 윌(맷 데이먼)의 얼굴을 감싸며 계속 "너의 탓이 아니야" 라고 말한다. 윌은 숀의 손을 내치며 짜증을 내면서도 눈물을 흘린다. 끝내 윌은 숀을 안으며 흐느껴 운다. 고아 소년으로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보낸 지난 날은 윌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숀의 단순한 지적은 차가운 방어기제로 둘러싸인 윌의 마음을 녹인다.

 

숀이 말한 불행과 고통은 너의 탓이 아니라는 지적은 사실 윌을 향한 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을 향한 말이다. 적어도 주인공 윌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주인공의 처지는 관객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한 효과를 준다.

 

하우저는 <예술의 사회학>에서 고급예술은 의미, 성찰, 진지함을 통해 사람들을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반면, 통속 예술은 불안과 고통을 경감시켜준다고 정리했다. 여기에서 통속예술은 대중문화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대중영화나 드라마는 진지한 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을 고뇌하게 만들기보다는 재밌고 단순한 설정과 장치가 배치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불안이나 고통을 감소시켜 주려 한다. 일종의 심리적 위안 효과를 준다. 대중문화 작품에서 애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바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는 것이다.

   
드라마 <로비스트>는 기본적으로 심리적 위안효과를 토대로 하고 있다. 위안 받아야 할 상처와 고통은 외부에서 온 것이다. 최완규 극본의 드라마 <올인>에서 인하(이병헌)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른 악인들과 돌발적 상황 때문에 절망의 고통의 나락에 빠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로비스트>에서 무장군인 침투토벌 작전 중에 해리(송일국)의 아버지는 목숨을 잃는다. 억울하고도 부당한 죽음이다. 이로 인해 가족은 풍비박산 된다. 미국으로 이민 간 뒤 백인 고모부는 폭력과 갖은 학대로 해리(송일국 분)와 여동생 수지(최자혜 분)를 옥죄인다. 그리고 갱은 끊임없이 남매를 괴롭힌다.

 

마리아(장진영 분)와 에바(유선 분)에 헌신적인 유성식(성지루 분)은 좌초된 잠수함을 정의롭게 신고하고도 국가 기관에 의해 그 진실성이 훼손되고 갖은 음해와 위협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게 된다. 미국에 이민을 오는 과정에서도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른다.

 

여기에다 자신을 속인 친구마저 용서하고, 성실하게 이민의 삶을 살아가던 유성식은 끝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은 마리아(장진영)와 에바(유선)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불행 그자체이다.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아간다. 그 원인 제공은 모두 외부에서 왔다.

 

이러한 외부 원인에 따른 고통과 불안은 복수와 공격, 무법행동을 합리화 하는 명분을 제공한다. 이는 <로비스트>의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동력이다. 항상 자신은 선한데 끊임없이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는 심리 때문이다. 더구나 <로비스트>에 등장하는 서양인은 대개 싸가지가 없고, 무례하고 되먹지 않았다. 항상 한국인을 괴롭힌다.

   
그래도 주인공을 감싸주는 것은 갱이나 마피아라고 해도 한국인이다. 이는 <올인>에서 반복했던 설정이다. 결국 인하(이병헌)와 종구(허준호)를 보듬은 것은 한국계 보스였다. 이들 드라마를 보면 천지에 한국인들이다. 당하기만 한 한국인들이 뭉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심리 같다.

 

물론 최완규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허준> <올인> <주몽>이 대표적인데, 선하게 살려는 주인공들과 이들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상황들을 단골로 설정한다. 대다수의 많은 이들이 실제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 시청률은 어느 정도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습화되고 규격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어서 우려스럽다.

 

무엇보다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외부로 전가하는 것은 일면 맞아 보이기도 하고 속 편해 보인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이 귀인(歸因)이론에서 지적하듯이 모든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끊임없는 피해의식이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고 그 대상에 대한 공격적이며 배타적인 태도를 합리화 하거나 공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로비스트>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로비스트, #피해의식, #최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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