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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일 개천절을 맞아 용문사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로 금석학 탐방을 갔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 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일중 김충현의 글씨로 도배된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천 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우람한 은행나무다.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 양태석

이 은행나무를 누가 심었는지는 여러 설이 전하여 내려온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의태자가 이 나무를 심었다면 그는 펼치지 못한 원대한 꿈을 열매 맺히려 했을 것이고,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마의태자를 찾아왔다 심었다면 그는 부모의 가없는 사랑을 열매맺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만약 고승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이 나무가 되었다면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후세에 길이길이 전파하고 싶음이었으리니, 그들의 뜻을 받들고자 이 은행나무는 천 년을 살고도 죽지 못함이 분명하다.

관음전 (일중 김충현)
관음전(일중 김충현) ⓒ 양태석


지장전 (일중 김충현)
지장전(일중 김충현) ⓒ 양태석


자비무적 (일중 김충현)
자비무적(일중 김충현) ⓒ 양태석

일중 선생과 이 사찰이 어떤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는지 몰라도 놀랍게도 사찰내 글씨의 대부분이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큰 사찰이 아니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가도 사찰의 역사가 깊어 유명한 명필들의 글씨가 살아 숨 쉴 것으로 기대가 컸는데 그렇지 못하니 아쉬움이 많다.

추사 글씨에 목매는 듯한 사찰들

다행스러운 건 대웅전의 현판이 추사의 글씨다. 그러나 참 놀라운 건 사찰 가는 곳마다 추사의 글씨가 있다는 것이다. 추사가 평생 그렇게 많은 글씨를 다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비학을 하며 느끼는 것은 사찰들의 추사글씨에 대한 애착이 좀 지나치다는 것이다. 용문사 대웅전 편액과 판전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한 용문사 대웅전 편액에 대해선 논할 가치도 없을 것 같다.

용문사 대웅전 편액 (완당 김정희)
용문사 대웅전 편액(완당 김정희) ⓒ 양태석


판전  추사 김정희의 말년 대작이자,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글씨 '판전'. 박규수 등은 이 글씨를 가장 추사다운 작품이라고 꼽았다.
판전 추사 김정희의 말년 대작이자,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글씨 '판전'. 박규수 등은 이 글씨를 가장 추사다운 작품이라고 꼽았다. ⓒ 양태석

용문사는 역사가 깊은 만큼 여러 번 화를 당해 중건을 거듭하였고 최근엔 1982년 이후 대웅전 등을 중건하였는데, 굳이 대웅전에 출처불명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추사 글씨를 달아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차라리 그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작가의 글씨를 대웅전 편액으로 달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금석학 탐방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건 선인들이 쓴 글씨에 대한 잘된 점과 부족한 점을 우리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즉석에서 잘된 점은 취하고 부족한 점은 수정하여 서법에 맞는 글씨를 써보고 원본 글씨와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의 서예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이다. 책으로 공부하며 시각적인 자형에 충실히 하는 것도 좋지만 현장에서 선인들의 얼이 깃든 글씨를 직접보고 피부로 느껴보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다고 본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낮춘 다산 정약용

돌아오는 길에 다산 정약용의 생가에 들렀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려는 다산 정약용의 하직상소문을 읽으며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유배생활의 길로 접어들고 오랜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많은 저서를 남겨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다산 정약용. 결국은 긴 유배생활 끝에 고향인 이곳에서 숨을 거두고 땅에 묻혔다. 사자가 되어 말이 없는 그의 무덤앞에 서니 엄숙하여 초가을의 바람결도 멈춰선다. 무덤가엔 적막이 흐르고 그 뒤론 인생무상이요 그저 쓸쓸함뿐이다.

다산 정약용의 묘비 생가 뒷산에 자리잡고 있음
다산 정약용의 묘비생가 뒷산에 자리잡고 있음 ⓒ 양태석

묘비의 글씨를 보면 구양순체와 안진경체가 혼용되어 있다.

멋도 멋이지만 기왕이면 한가지 체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용문사#금석학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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