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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다른 돌들이 다 멀쩡해도 돌다리 몇 개가 물에 잠겨 징검다리는 소통불능상태다
징검다리 다른 돌들이 다 멀쩡해도 돌다리 몇 개가 물에 잠겨 징검다리는 소통불능상태다 ⓒ 안준철

수업시간에 한 아이를 불러냈다. 단아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키가 적당히 작은 아이다. 나는 아이를 내 곁에 서게 했다. 키 차이가 꽤 났지만 무릎을 조금 오므렸더니 키가 거의 같아졌다. 나는 무릎을 다시 펴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키가 크고 멋지게 생긴 아나운서가 있었어요. 그 아나운서가 오락프로그램 사회를 보면 출연한 사람들의 키가 무척 작아 보였어요. 그래서 연예인들은 그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을 꺼렸지요. 단아하고 선생님하고 이렇게 서 있으니까 어때요? 단아의 키가 좀 작은 편이지만 선생님 키도 아주 큰 편은 아니어서 그런대로 어울리지요? 단아를 위해서 선생님 키가 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왜 수업을 하다 말고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사실 그날 수업은 정규수업이 아닌 일종의 땜질 수업이었다. 동료 교사 한 분이 갑자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급하게 수업을 짠 것이었다. 원래 보강 수업은 하루 전에 학생들에게 전달하여 수업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너무 갑자기 터진 일이라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나는 팝송을 자주 애용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마침 전날 쓴 자작시 한 편을 영역 해놓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수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시를 무척 좋아하는 원어민 교사 헤더(Heather)에게 보여주려고 어쭙잖은 영어실력을 발휘하여 영역 해본 것이었다.

징검다리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다
돌다리 서너 개가 물에 잠겨 있어
남은 돌들이 멀쩡해도
시방 징검다리는 소통불능상태다


내 안에도 징검다리가 있다
물이 닿지 않아 잘 마른 외로움들
그 오랜 수고를 헛되게 하는
젖은 돌도 몇 개 박혀 있다


물이 졸아들어야 돌다리가 드러나듯
이제는 나도 졸아들 궁리를 해야겠다
누구에게는
가 닿지 않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Stepping stones across a stream

I can't step from stone to stone across a stream
Because a few stones are under water
Even though the rest of the stones are normal
Now, the stepping stones are unable


I have the stepping stones in my mind
Water can't reach, so well-dried loneliness
Also a few wet stones exist
That spoil the long effort


After water shrinks, stones appear
So I will deliberate that shrink myself
To someone
Not to go and touch will be love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그러다 보니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있는 날이 많았다. 며칠째 맑은 날이 계속되어 징검다리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돌다리가 두세 개만 물에 잠겨 있어도 징검다리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저녁 산책길에 늘 건너가곤 했던 징검다리를 며칠째 건너지 못하고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문득 내 안의 징검다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 딛고 건너가기에 좋을 만큼 잘 말라 있는 돌들 사이로 젖은 돌도 몇 개 박혀 있는. 그 젖은 돌을 잘못 디뎌 발을 삐거나, 아예 발걸음을 되돌린 사람이 없지 않았을 터. 그러니 이제라도 나는 졸아들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 돌다리가 훤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이론으로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사랑은 실천해야 사랑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실천해야 사랑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 배워야 알 수 있다. 특히 욕망과 사랑을 혼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넘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며, 오히려 졸아드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은 중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 사랑의 논리라면 물이 졸아들어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징검다리가 딱 제격이다.

"단아가 징검다리라고 생각해봐요. 단아가 더 돋보이기 위해서는 물이 졸아들어야 해요. 물리 졸아들어야 돌다리가 드러나니까요. 나는 물이에요. 나는 단아를 위해서 이렇게 키를 낮추듯 졸아들고 싶어요. 왜? 나보다는 단아가 더 중요하니까.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나도 졸아들 궁리를 해야겠다고 한 거예요. 단아를 위해서. 내가 단아를 사랑하니까요. 사랑은 욕망과는 다르거든요. 때로는 다가가지 않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어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 아닌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고마리  징검다리가 있는 냇가에는 철마다 꽃들이 피었다가 진다. 마치 계절을 건너는 징검다리 꽃처럼.
고마리 징검다리가 있는 냇가에는 철마다 꽃들이 피었다가 진다. 마치 계절을 건너는 징검다리 꽃처럼. ⓒ 안준철

35명의 아이들 중에 단 한 명의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족할 수도 있다. 그 한 명마저 없었다면…. 수업을 마치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나는 파김치가 다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눈빛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버린 탓이다. 요즘 아이들이 그렇다. 아이들과 시를 얘기하고 삶의 진실을 나누는 것이 너무도 버겁다. 그래도 포기가 안 된다. 포기해서도 안 될 것 같다.

교무실로 돌아와 나는 물 한 컵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는다. 나의 순간적인 절망감은 '내가 교사로서 덜 졸아든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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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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