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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것은 머리까지 뒤집어쓴 검은 천 사이로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에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얼굴 중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희게 보일 수 있는 부위가 눈의 흰자위와 이빨이다. 헌데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풍철한의 검을 맞고 선화의 소수인장에 정통으로 가격되었다면 지금쯤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허나 흑영은 땅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불편한 듯한 모습이지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괴물이었다. 중원사괴를 괴물들이라고 하지만 저 흑영은 차원이 다른 괴물이었다. 허나 풍철한과 선화는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다시 흑영을 덮쳐갔다. 허나 이미 장내로 뛰쳐나온 천번과 곤번, 그리고 감번이 병기를 뽑아들며 풍철한과 선화를 향해 마주쳐 왔다. 두 사람의 공격에서 흑영을 보호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타타타탁 츠으으

감번과 곤번이 각기 한 사람씩을 맡아 풍철한과 선화를 상대하려고 달려들자 천과는 흑영을 보호하며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였다. 풍철한의 짧은 수염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감히 내 앞에서 내 친구를 데려 갈 수 있으랴!”

츄팟!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풍철한의 검에서 눈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시퍼런 섬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풍철한과 맞서 가던 감번은 마치 검의 해일(海溢)이 몰려오는 것과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허억’

감번은 본래 수공(水攻)에 능한지라 그의 병기도 유선형의 분수자(分水刺)였는데 풍철한의 공격이 갑작스럽게 위맹해지자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마주쳐갔다. 어찌되든 피하기만 하려고 마음 먹는다면 제 한 몸 피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자신이 비켜나면 천과나 흑영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마주치고 볼 일이었고 수비에 치중해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마음먹었다.

빠지지직

허나 결과는 참담했다. 급작스럽게 진기를 끌어올린 탓도 있었지만 노기가 하늘까지 치솟은 풍철한의 검을 막기엔 이미 그의 능력의 한계를 넘은 일이었다. 분수자가 풍철한의 검에 부닥치는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져 날아갔고, 시퍼런 몇 줄기 검광이 감번의 몸을 관통해 버렸다.

솟구쳐 오르던 감번의 몸에서 허공을 가르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감번의 몸은 상체와 하체가 뒤로 젖혀져 활처럼 굽었는데 어두운 달빛 아래서 관통되어 양쪽으로 솟구치는 검붉은 핏줄기는 끔찍했다.

감번의 신형은 곧 바닥에 떨어져 내리며 널브러졌는데 그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풍철한의 검을 광검(狂劍)이란 한다지만 단 일검에 팔번 중 하나인 감번이 즉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추산관 태감의 얼굴색이 홱 변했다. 놀람과 함께 미세하나마 두려운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상만천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다른 점은 두려운 표정 대신에 경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육파일방의 인물들 역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풍철한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 있었다. 그의 검을 본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랬다. 그의 검에는 격식도 없고, 검이 가진 특징도 무시된다고. 그래서 미친 검(狂劍)이라고. 허나 그의 검을 접해보면 천하제일검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 말은 그저 검을 모르는 허접스러운 무림인들의 말이라고 치부했었다. 검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다른 병기와는 달리 분명 검의 특성에 따른 엄격한 형식을 가져야 그 모용을 십분 발휘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힘으로 휘두른다는 것은 그저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에 불과한 것.

허나 아니었다. 직접 본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고 싶었다. 일반 검보다 반자나 긴 장검을 휘두르는 풍철한의 검격은 확실히 일반의 검법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 위력은 모든 것을 파괴할 만큼 무게를 가진 중검(重劍)이었고, 또한 시퍼런 귀화나 섬광처럼 보이는 검기(劍氣)를 뿜어내는 미친 검이었다.

빠직 빠박

거의 동시라 할 수 있는 순간 통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급한 신음이 흘렀다.

“으윽.”

동시에 허공에서 누가 누군지 분간도 할 수 없게 선화와 뒤엉켰던 곤번의 신형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며 뒤로 주륵 밀려 지면에 떨어졌다. 입에서 터져 나온 몇 모금의 핏덩이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분명 선화의 소수인장에 당한 모습이었다.

이미 오라버니가 상대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이어서 그녀 역시 손속이 사정을 두지 않고 있는 터라 한 겹 얼음을 두른 것 같은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허나 그녀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도 누구 피인지 모르지만 가느다랗게 혈선을 긋고 있었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팔꿈치까지 옷이 찢어져 흰 살결이 어둠 속에서 유독 빛나는 듯 했다. 긁힌 상처나 다른 곳의 옷도 나풀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그리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진기가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큰 상처가 나거나 중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마 계속 곤번을 노리고 손을 썼다면 곤번은 사경에 빠졌을 터였다. 허나 그녀의 목적은 역시 흑영의 손에 들린 함곡을 구출하는 것이었던지라 지체 없이 흑영 쪽으로 신형을 날리려다 잠시 주춤했다.

그녀의 눈에 풍철한이 엄청난 검기를 부리며 거침없이 비칠거리는 흑영을 재촉하며 뒷걸음질치는 천과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런 기세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선화는 말로만 듣던 풍철한의 위용을 직접 보게 되자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신에게 뺨을 맞을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소수인장을 익히곤 있다한들 저런 인물이 피하고자 한다면 피하지 못했을까? 그저 맞아 주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으음.’

천과는 내심 신음성을 흘렸다. 마치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듯 광풍을 일으키며 쏘아오는 풍철한의 기세에 천과는 처음으로 얼굴에 얼핏 두려움을 떠올렸다.

번쩍! 츠파파팟!

천과를 향해 또 다시 좌중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시퍼런 섬광이 작렬했다. 천과는 이를 악물고 들고 있던 섭선(攝扇)을 쫙 펴면서 마주쳐갔다. 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급급했지만 흑영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상만천이 서너 발자국 나서며 그의 뒤에서 호위하고 있던 이군(二君)이 나서지 않았다면 천과 역시 어찌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콰콰콰콰

이군이 좌우로 나뉘어 맹렬하게 쌍장을 내뿜자 마치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굉음이 들리며 풍철한의 시퍼런 검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천지#추리무협#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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