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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유일하게 4개 주가 모여있는 포코너스.
 미국 내 유일하게 4개 주가 모여있는 포코너스.
ⓒ Uta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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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와 붙어 지낸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로 지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속되어 있거나 늘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요인에 의해 두 가지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특별히 영토나 국경을 마주하는 지역을 보면 심심찮게 긴장 속에 대립을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는 조금 특별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나 둘, 넉넉잡아 셋도 아니고 무려 4개 주가 함께 인접해 있는 곳. 두 발과 두 손으로 모든 주에 걸쳐 사진을 찍어볼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은 바로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주에 걸쳐있는 포 코너스(Four Corners)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오면서부터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끼게 됩니다. 하얗고 검던 사람들의 피부가 점점 땅 색깔을 닮아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은 말들은 나로선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를 능가하는 외계어로 들립니다.

'다소 억양이 격한 스페인어 사투리? 그렇다면 남부 지역에 밀집해 산다는 그 멕시코인들?'이라고 빵과 음료수를 먹으며 찬찬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뭔가 요상한 낌새들이 보입니다. 토테미즘 요소가 가득해 보이는 각종 장신구와 기개 넘치는 옛 조상들의 사진. 그들은 바로 나바호 인디언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 말에 돌아선 인디언

늘어지게 하품 한 번 하고 텐트를 걷습니다. 지난 밤 세심하게 신경 쓴다고 했는데도 텐트 안에 모래가 쓸려 들어왔습니다. 한창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차 한 대가 내게로 다가오는 게 보입니다. 필시 내 앞에서 멈춰 설 거란 예상은 어김이 없습니다.

"이 봐. 자네 잘 잤는가?"
"네? 아, 네. 뭐 그럭저럭 잘 잤습니다."

주변 정리하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대꾸합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 든 나바호 인디언입니다.

"잘 잤다니 다행이군. $10일세."
"네?"
"여기서 잤으니 숙박료를 내야지. 여긴 내 구역이니까."

아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입니까? 아무런 권고사항도 보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와서 자릿세를 달라니요. 그의 뜬금없는 얘기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제가 알기론 여기는 캠핑장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전 지난 밤에 물 한 번 써 보지 못했고 보시다시피 이런 악조건 위에 텐트를 쳤습니다.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은 게 있다면 모르겠지만 10달러는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흥분도 그렇다고 낙심도 아닌 또렷이 전한 내 말에 그는 잠시 정면을 응시하더니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습니다.

"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알았어. 그럼 주변 정리하고 조심히 떠나. 행운을 비네."

그러고는 다시 차를 돌려 떠나갔습니다. 그는 의외로 너무도 순박해 보였습니다.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괜시리 10달러 줘 버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요. 그런데 사막을 빠져나올 때 쯤 알았습니다. 'Camping ground'라는 표지판을 보고서 말이죠.

여기가 캠핑 장소가 맞긴 했구나라고.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니 내가 텐트를 친 자리보다 약 1마일 정도 더 가면 캠핑장소가 있었는데 결국 난 캠핑장소가 아닌 그 곳으로 가는 길목에 텐트를 쳤던 것입니다. 밤이었으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당연했겠지요.

동양인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외관의 나바호 인디언. 여러 설이 파다한 가운데 그들의 기원이 궁금하기만 하다.
 동양인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외관의 나바호 인디언. 여러 설이 파다한 가운데 그들의 기원이 궁금하기만 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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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다시 그의 아들로 보이는 이가 내게로 왔습니다.

'아버지가 안 되니 아들을 대신 보낸 거 아냐?'

불안한 마음 애써 감추었지만 아들은 나를 보더니 별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잠은 잘 잤느냐고, 모래 위에서는 탈 수 없기에 힘들게 자전거를 끌고 도로 쪽으로 나가는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건투를 빈다는 말만 남긴 채 이내 내 곁을 스쳐지나갑니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자기 의견만 고집하며 빡빡 우기는 것이 아닌 남의 의견을 존중하며 받아들일 줄 아는 인격. 나바호 인디언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시설이 갖춰져 있는 정식 구역이 아닌 불편한 사막에서 하룻밤 몸을 뉘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10달러에 내 자신이 옹졸해진 것만 같아서 가뜩이나 태양에 붉어진 얼굴이 더 화끈거립니다.

때론 논리적 합리화보다 감정적 매카니즘이 더 의미있는 일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사막에서의 하룻밤이 제게 10달러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 건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4개 행정구역의 땅, 한데 모은 것을 기념하며!

포코너스 방문시 끊어야 하는 티켓. $3.
 포코너스 방문시 끊어야 하는 티켓. $3.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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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코너스 전경. 각 주를 대표하는 주기와 미국기가 걸려있다.
 포코너스 전경. 각 주를 대표하는 주기와 미국기가 걸려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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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았는데, 뉴욕에서 양키즈 스타디움 티켓을 끊은 뒤로 처음으로 입장티켓을 끊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유혹에도 유료 입장에 대해서만큼은 절제하고 그랬는데 이쯤에서 한 번 쯤 티켓을 끊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끊은 포 코너스의 입장료는 3달러.

1992년 화강암에 끼워 넣어진 청동색 디스크로 기념물.
 1992년 화강암에 끼워 넣어진 청동색 디스크로 기념물.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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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 감정인들과 천문학자들은 1868년 콜로라도의 남쪽 경계를 시작으로 1878년에는 뉴멕시코의 서쪽 경계와 유타의 동쪽 경계를 그리고 1901년에는 애리조나의 북부 경계를 조사했습니다.  이렇게 4개 행정구역의 땅을 한데 모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화강암에 끼워 넣은 청동색 디스크로 기념물을 세웠습니다. 포 코너스는 이 기념물을 방문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 장소입니다.

더불어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디언 수공예품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물론 이곳이 나바호 인디언 구역 경계에 있으므로 민속학으로 봤을 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으나 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그들이 성지로 여기는 모뉴먼트 밸리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포코너스 포토서클에서 한 아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코너스 포토서클에서 한 아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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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 로페카(Ropeca)와 함께 찍은 사진.
 애마 로페카(Ropeca)와 함께 찍은 사진.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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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3달러 입장료가 가당키나 할 만큼 포 코너스가 괜찮은 곳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딱히 별 볼 일 없는 것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고, 의미를 부여하면 아깝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부르주아 여행객이라면 또 아무 생각없이 그깟 3달러 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인디언들

포 코너스라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유형의 흥미거리를 이용해 입장료를 받고 그 안에서 수공예품을 판다고 문제제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포 코너스가 나바호 인디언 자치국의 공원이니만큼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기부금조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핸드메이드 제품을 파는 인디언 상가. 작은 점포에 희망없는 분위기가 어쩐지 시선을 피하고 싶어진다.
 핸드메이드 제품을 파는 인디언 상가. 작은 점포에 희망없는 분위기가 어쩐지 시선을 피하고 싶어진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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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침략한 백인들에 의한 이주정책으로 자기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다시피해서 정착한 그들만의 척박한 토양. 정부차원 관리 혹은 감시체계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 하지만 어쩐지 어폐가 느껴지는 보호구역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몇 푼의 연금을 쥐어받고 살아가는 고단한 삶에 대한 보상이라면 3달러는 결코 비싼 금액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독특한 민족성과 문화를 보러 오지만 적어도 미국 내 물질문명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 그들의 전시문화는 마음을 채우지 못한 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을 안겨 줍니다.

포코너스를 빠져 나와 다시 사막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녹록지 않은 여정. 하지만 인디언들의 삶만큼이나 고단할까?
 포코너스를 빠져 나와 다시 사막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녹록지 않은 여정. 하지만 인디언들의 삶만큼이나 고단할까?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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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붉은 땅에서 살아온 그들의 얼굴 역시 땅의 색깔을 닮아 있지만 그 땅의 삶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합중국의 기조와는 괴리가 많아 보입니다.

행정가들이 포 코너스를 네 구역으로 나누었지만 그들이 꿈꾸는 터전은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에게 종속되어 버린 인디언이라는 특별한 시선이 아닌 황인, 백인, 흑인처럼 편안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를 기대해 봅니다. 내 두 손과 두 발이 맞닿아 자유롭게 넘나드는 포 코너스를 지나며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인디언들의 가난한 표정의 노래가 마음의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문종성, #미국횡단,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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