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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모방범>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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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공원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오른팔과 핸드백이 발견되면서 연속유괴살인사건의 막이 오른다. 놀랍게도 범인은 텔레비전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랑스럽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피해자 '마리코'의 외할아버지인 '요시오'를 농락하기도 한다. 유괴와 잔인한 살인과 범행의 공개가 이어지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소설 <모방범>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 수사하는 경찰들, 범인과 그 가족과 주변 사람들. 작가는 세 권 모두 합해 1600쪽이 넘는 분량에 그 많은 사람들을 날실과 씨실로 엮고 사방으로 정교하게 이어가면서 '이유 없는 범죄'를 우리들 삶에 깊숙히 들이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을 단순한 범죄소설, 범인을 쫓는 추리소설로만 볼 수는 없다. 처음에는 발견자와 피해자 가족과 경찰의 시선으로 시작을 하지만, 중간에 범인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면서부터 복잡한 소설의 구조는 결국 우리들 얽혀 있는 삶의 그물을 실감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다가 누구라도 한 순간에 피해자 혹은 피해자 가족이 될 수 있으며, 범인의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살얼음판 같은 우리들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같다.

두부가게를 하고 있는 일흔 둘의 '요시오' 할아버지. 남편과 별거중인 마흔 네 살 딸로 인해 속상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무 살 외손녀 '마리코'가 실종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딸, 냉담한 사위 사이에서 '요시오' 할아버지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범인에게 농락당하면서도 할아버지는 끝내 그 균형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보통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기함을 하거나 몸져 누울 상황이건만 할아버지는 강한 정신력으로 버틴다. 딸마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의식을 잃고, 손녀의 유해가 발견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 계신다.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겠지만 할아버지는 사건과 관련된 주변 사람들에게뿐만이 아니라 범인에게조차도 침착하고 분별력있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하고 때론 호통을 치기도 한다. 위로 받아야 할 처지이건만 힘들어 하는 주위 사람을 마음 깊이 위로해주기도 한다.

범인에게 지목되어 농락당한 것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지만, 할아버지가 어찌나 잘 대응하고 현명하게 처신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존경의 마음을 품기에 이른다. 물론 할아버지는 시시때때로 자신과 자신의 딸, 자신의 외손녀에게 닥쳐온 운명에 저절로 무릎이 꺾이는 순간을 경험하지만 말이다.

외손녀의 실종과 딸의 간호를 모두 홀로 짊어져야 하는 노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며, '마리코의 수명을 나에게 주시오' 절규하는 노인.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는 유괴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됨으로써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노인. 욕심내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며 지켜온 인생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망가져 버리는 것을 두 손 놓고 바라보아야 하는 노인.

일흔 둘 할아버지가 겪는 가혹한 현실에 가슴이 아팠고, 그 어려움을 그동안 살아온 경험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꼿꼿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힘들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이런 저런 연유로 만나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건의 최초 목격자이자 예전에 일어난 일가족 살해사건의 피해자인 열일곱살 '신이치'도 어느 날 할아버지를 보며 묻는다. '젊었을 때도 지금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었을까?'

진범이 밝혀진 후 할아버지는 일갈한다. "네가 비참하게 죽인 건 네가 말하는 대중이니 뭐니 하는 무리 속에 끼웠다 뺐다 하는 부품이 아냐. 어느 누구나, 한 사람의 어엿한 인간이었어… 네 놈 역시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아."

범인이 잡히고 언론과 세상은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모두 끝났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는 소리친다. 웃기지 말라고, '마리코'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끝냤냐고, '마리코'를 돌려달라고.

긴장감에 손에서 놓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나는 '요시오' 할아버지를 유독 눈여겨 보았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킨 할아버지를 보며 사연 많고 굴곡 많은 인생을 끝까지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할아버지도 어쩜 당장 죽어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여기서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아프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가르쳐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모방범>(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2007)



모방범 1 - 개정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문학동네(2012)


태그:#모방범, #노인, #노년,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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