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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앞에 보이는 낮은 집이 공부방이다.
맨 앞에 보이는 낮은 집이 공부방이다. ⓒ 김치민

두라도 공부방은 산꼭대기 마을 봉통의 작은 집에 있다. 저녁 식사를 하고 해가 서쪽 바다를 가로지르면 아이들이 작은 공부방으로 모인다. 난 화요일과 목요일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전남 여수의 두라도는 작은 섬이지만 대두, 선창, 봉통 등 마을이 셋이다. 대두에서 봉통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20분 남짓 걸린다. 대두와 선창에 사는 녀석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비탈을 올라 봉통 공부방으로 모인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통학선에서 내리면서 표정을 바꾼다. 때론 불쌍하게, 때론 매우 피곤한 표정을 짓는다.


"선생니임∼∼"


듣는 둥 마는 둥 비탈길을 오르면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오늘 못가요. 선생님!"

 

 '저건네' 바닷가 아이들 수영장 가는 길
'저건네' 바닷가 아이들 수영장 가는 길 ⓒ 김치민

녀석들은 저녁 일곱 시면 우산 속에 고개를 묻고 작은 공부방 문을 연다. 피곤하고 불쌍했던 표정은 없다. 거친 황야를 횡단한 용사의 모습으로 들어선다. 비설거지하고 제자리에 앉아 자세 잡기까지 10분여가 지난다. 뭘 좀 하는가 싶으면 벌써 쉬는 시간이다.


시작 시각은 아이들 맘이다. 1분 남았느니, 시계가 빠르다느니 하면서 지체하기 일쑤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소란을 떤다. 그런데 끝나는 시간은 정확하다. 시곗바늘이 50분 근처만 가면 이미 책 덮는 소리가 방안을 채운다.


밤 아홉 시면 대두 녀석들은 공부방을 나선다. 공부방에서 한 일이라곤 역사신문 한 면 만든 것이 전부이거나. 모둠일기 쓰고 영어 단어 몇 개 외우거나, 학교 숙제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공부방을 나서는 녀석들 얼굴은 당당하다.

 

 봉통 가는 길에서 만난 고라니와 청솔모
봉통 가는 길에서 만난 고라니와 청솔모 ⓒ 김치민

밤 아홉 시, 녀석들과 함께 밤길을 걷는다. 산등성이에 꼬불꼬불 붙어있는 오솔길이다. 작은 화물차가 혼자서만 다니는 길. 군데군데 소나무가 장승처럼 양편에 서서 바닷물 빛을 막아 희미한 산길의 윤곽을 가린다. 풀 섶에서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울면 뒷골이 서늘하고 잠자던 꿩이 발걸음에 놀라 바스락거리는 길.


산에서 제 맘대로 흐르는 물들이 길을 타고 흘러 여간 조심해도 신발이 추적추적 소리를 낸다. 어두운 밤에는 작은 불빛도 밝다. 개똥벌레가 꽁무니에 옥색 불빛을 달고 풀 섶을 난다. 아이들은 이미 공포영화를 감상 중이다. 길옆 묘지에서 머리 산발하고 소복 입은 귀신을 보고, 발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버무려 완벽한 입체음향을 경험한다. 빗물에 흘러내린 황토에 미끄러지며 지른 비명이 더해지면 완벽한 공포영화다.

 

 돌담 골목을 지나면 아담한 선민이 집이 있다.
돌담 골목을 지나면 아담한 선민이 집이 있다. ⓒ 김치민
 아이들은 꽃이다. 스스로 자라는 예쁜 꽃이다.
아이들은 꽃이다. 스스로 자라는 예쁜 꽃이다. ⓒ 김치민

한바탕 소동이 지나면 아빠가 고기 잡은 얘기, 엄마에게 서운했던 얘기, 친구들 얘기 등 아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맞장구를 치며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스스럼없이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는 아이들만의 속내가 고스란히 녹아든다. 불편하고 어려운 섬 생활에 녀석들은 나름의 소망을 담는다. 미용사, 선생님, 디자이너……. 걷는 동안 수없이 희망이 바뀐다.


원어민 선생님의 생일 파티를 할 계획인데 절대 누설하면 안 되고, 누구는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와 누구는 싸워서 서로 삐졌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욕설은 누구 짓이 틀림없고, 오늘 숙제 때문에 누가 혼났고……. 녀석들은 내가 담임선생인 것을 잊었나 보다.


선창 입구다. 인사 꾸벅하고 바쁜 걸음으로 내려가는 녀석들을 보내고 나면 혼자다. 내가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시간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큰 느티나무 아래 조그만 오두막집이었다. 아이들과 마을 골목에서 신나게 놀다 보면 해를 넘기기 일쑤였다. 놀 때는 좋았는데 어두워진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집에 가는 것이 여간 고역이었다. 느티나무 그늘 속에서 삼신할매가 내려다보고, 얼굴 없는 발자국 소리가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나무 위의 부엉이 소리는 도깨비보다 무서웠다.


지금 내게는 순식간에 납양특집을 꾸미는 아이들의 순박함이 없다. 풀벌레는 그냥 풀벌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고라니 이거나 밤새 매어둔 소들이 내는 소리다. 길 옆 언덕에 보이는 묘지는 그냥 무덤일 뿐이고, 멀리 말머리 모양을 한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일 뿐이다.

다시 공부방이다. 벌써 밤 9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무언가에 열중이다. 만화도 보고, 초등학생용 과학 전집 그림도 본다. 찬민이는 한자 숙제에 여념이 없다.


작은 섬에서 꿈을 꾸는 녀석들. 쉬는 시간마다 사슴벌레를 찾아 가로등 밑으로 뛰는 녀석들. 섬 구석구석 딸기밭을 샅샅이 알고 '저건네' 바닷가 수영장에서 온 여름방학을 지낸 녀석들.


섬을 한 바퀴 도는 좁다란 길에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제 모양으로 피어난다. 아이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가진 꽃이다. 거친 바람과 파도를 견디며 자라는 길가 들꽃처럼 스스로 자라고 피는 들꽃들이다.


아이들 눈이 시계를 향한다.


"집에 가자!"

 

 제비꽃인가?
제비꽃인가? ⓒ 김치민
 길가에 피어난 야생화
길가에 피어난 야생화 ⓒ 김치민

#두라도#공부방#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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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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