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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할머니 석상(현재 모습) 높이 141cm, 가슴둘레 85cm
밥할머니 석상(현재 모습)높이 141cm, 가슴둘레 85cm ⓒ 박상진
석상을 다시 옮겨온 그해 11월 11일 오전 11시 동산동 밥할머니 보존위원회 차동규(78·車東奎) 위원장을 비롯한 노인 15명은 북한산이 보이는 밥할머니 석상 앞에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밥할머니를 기리는 첫 제사를 지낸 바 있다. 2006년 10월 24일 고양시 향토문화재 심의위원회(위원장 이희웅)에서는 밥할머니상을 고양시 문화재로 지정하기로 결의했다.

이번 기사는 기자가 2003년 5월 28일 ‘은평향토사학회’ 제1회 정기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밥할머니의 생애와 호국사상’을 토대로 밥할머니의 생애를 재현한 것이다.

사량진(蛇梁鎭)에 왜구가 침입하는 등 민심이 뒤숭숭하던 중종 39년(1544)1)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연은방(延恩坊 : 城外) 불광산계(佛光山契 : 지금의 불광2동 延川마을)에 있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하나였던 밀양박씨(密陽朴氏) 집안에서 한 여자 아이가 출생했다. 태어난 아이는 체구가 커서 여자 아이임에도 사내아이처럼 보였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게 한 밥할머니였다.

밥할머니 석상(89년 8월 동산리 당시 모습)
밥할머니 석상(89년 8월 동산리 당시 모습) ⓒ 박상진
밥할머니는 나이 20세가 되어 혼기(婚期)가 차자 곧 이웃 마을에 있는 토호이자 명문가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남편의 이름은 문옥형(文玉亨)으로,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연은방(延恩坊 : 城外) 불광산계(佛光山契 : 지금의 불광동)에 많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던 만석지기 부호(富豪)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시댁이 워낙에 부유한 집안이라 부족한 것이 없었고, 남편인 문옥형과의 사이에는 외아들 문천립(文天立)을 두고 있어서 결혼생활은 행복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평소부터 검소함이 몸에 밴 할머니는 가끔씩 남몰래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시집온 후로부터 사랑으로써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정성을 다해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하였으며, 근검(勤儉)으로써 집안을 다스리니 당시 이웃 마을까지 효부(孝婦)가 나왔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조 25년(1592년) 평온한 마을에 뜻하지 않은 시련이 몰려왔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왜적의 대규모 침략이었다. 당시 49세의 장년이었던 밥할머니는 피난짐을 꾸리던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왜적과 싸울 준비를 시작한다. 할머니는 남편에게 집안의 곡식을 조선군의 군량미로 사용하려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산속 동굴 속으로 옮겨 보관하게 한다.

당시의 임금이던 선조는 피난 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援兵)을 보내줄 것을 간청하니 그해 12월 8일 신종황제는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임명하여 4만 1천명의 주력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정토록한다. 이듬해 1월 9일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한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수도 한성을 탈환코자 남하를 시작한다.
삼송동 도화공원에 있을 때(두상을 올려놓기 이전 모습)
삼송동 도화공원에 있을 때(두상을 올려놓기 이전 모습) ⓒ 박상진
이에 따라 먼저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경기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길 안내를 받으면서 선발부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25일 파주에서 서오릉의 창릉(昌陵 : 예종의 능) 방면으로 나갔다가 왜장 가또오 미쯔요시(加藤光泰)와 마에노 마가야스(前野長康) 등이 거느린 적의 수색대와 충돌하게 된다. 사대수는 불시에 기습을 감행하여 미륵원(彌勒院) 앞 싸움에서 왜적의 목 130여 급을 벤 후 기병 2,3백기를 이끌고 적과 싸우다가 연서역(延曙驛)에서 여러 겹으로 포위되고 만다.

그때 건장한 6척 장신으로 통이 큰 여장부였던 밥할머니는 남편에게 밤중에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북한산 노적봉을 짚으로 둘러 노적가리처럼 위장하게 한다. 이튿날 낮에 밥할머니는 함지박을 이고 창릉천(昌陵川)으로 갔다. 그때 마침 왜병들이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할머니를 보고 물이 뿌연 까닭을 묻게 된다.

그러자 밥할머니는 북한산 노적봉(露積峰)을 가리키며, 저곳에 조선군 수만 명이 주둔해 있는데 저것이 바로 조선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노적가리라고 말한다. 그리고선 ‘마침 밥을 지을 시간이니 쌀 씻은 물이 흘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핀잔어린 말을 한다. 그리곤 쌀이 남아서 가져가라기에 가져오는 길이라며 함지박의 쌀을 보여주곤 총총히 사라진다.

밥할머니 석상(2004년 5월) 삼송동 도화공원에 있을 당시 모습
밥할머니 석상(2004년 5월)삼송동 도화공원에 있을 당시 모습 ⓒ 박상진
왜적들은 할머니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더는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던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물을 마시고 끌고 왔던 말에게도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물을 마신 왜적들은 다들 배탈이 나서 배를 움켜잡고 쓰러져 고통스러워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밥할머니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총병 사대수는 이때를 놓칠세라 군사들을 독려하며 친히 선두에서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적을 찔러 공중에 던지면서 진군의 북을 치게 하니 적들은 추풍납엽(秋風落葉)처럼 공중에 날아가고 북소리가 땅을 흔들어서 혈로(血路)가 스스로 뚫리게 되었으며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서 돌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모두가 밥할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으로 남편인 할아버지와 미리 짜고 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왜적이 물러가자 할머니는 쉴 사이도 없이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끄는 조선군이 적과 싸우기 위해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인근 마을의 싸울 수 있는 젊은 남녀를 모두 거느리고 남편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벽제관 전투가 끝난 지 겨우 2주 밖에 되지 않은 2월 12일, 행주산성(幸州山城)을 향해 진격해오는 왜적을 상대로 남자들은 관군(官軍)을 도와 활을 쏘며 싸웠고, 여인들은 밥할머니의 통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 솥에 물을 끊이기도 하였으며, 부상병을 치료하는가 하면 주먹밥을 만들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평소에 불심(佛心)이 두터웠던 밥할머니는 많은 돈을 북한산 사찰에 희사(喜捨)하였으므로 주위로부터 ‘보살할머니’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후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이미 80세의 고령이었는데, 아들 문천립(文天立)을 시켜 많은 군량미를 내놓는다.

왕은 문천립의 공을 잊지 못해 그에게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位階)를 내리고, 불광동(佛光洞)에 3일 갈이의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 별도로 성을 이씨로, 본관을 완산(完山)으로 바꾸게 하였다고 <남평문씨 충양공파보(南平文氏忠襄公派譜)>에 기록되어 있다. 즉 종실(宗室)인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성(賜姓)한 것이다.

행주산성의 행주치마 여인부대 부조 행주대첩 당시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는 치마부대의 모습이다
행주산성의 행주치마 여인부대 부조행주대첩 당시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는 치마부대의 모습이다 ⓒ 박상진
밥할머니의 사망년도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조반정을 한 해이거나 이로부터 몇 년 뒤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밥할머니가 돌아가자 외아들인 문천립은 어머니를 불광동(佛光洞) 건좌(乾坐 : 서북방)를 등진 언덕에 있는 아버지 문옥형(文玉亨)의 묘에 합장을 한다. 할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은 인조도 할머니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봉하고 남편인 문옥형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를 내린다.

효종 9년(1658) 고양군 신원동에 덕명교(德明橋)를 가설할 때도 아들 문천립이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거금을 희사하게 된다.

밥할머니 묘소는 1975년 후손들에 의해 화장(火葬)되기 전까지만 해도 불광동(佛光洞) 150번지에 남아 있었으며, 재실(齋室)은 진관외동 186-2 폭포동(暴布洞) 싱아굴에 있었으나 1957년 화재(火災)가 나서 전소(全燒)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밥할머니 자손들은 그 많던 땅이 모두 밥할머니의 사패지(賜牌地)라고 믿고 있다. 이곳 토박이들은 매해 가을이면 수확한 곡물(穀物)을 '밥할머니 몫'이라 하여 항아리에 담아 농사가 잘 되게 하여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 새해에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엔 정월 보름날에 인근 마을 토박이 주민들이 햅쌀, 백설기, 햇과일 등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밥할머니는 임진왜란 유일의 여성 의병장이니만큼 동상(銅像)과 사적비(事蹟碑) 건립 등 기념사업이 추진되기를 고대해본다.
#밥할머니#노적봉#능모퉁이 공원#동산동#은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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