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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사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 것은 운중의 방관자로서의 애매한 태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부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제자들로서는 각기 자기의 살길을 찾은 것뿐이었다.

“자네에게 미안하구먼... 이리와 앉으라니까....”

성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장문위에게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는 다른 제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제자들은 또 한 번 가슴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야단맞을 사람은 장문위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는 점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오늘 제자들 앞에서 속내를 보였다. 이 운중보를 제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 말이다.

“중의 이 친구는 아마 뭔가 나에게 단단히 따질 일이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이렇게 왔겠지. 그렇지 않은가?”

보주는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사실 장문위의 처사는 파문을 해도 시원치 않을 일이다. 대제자로서의 본문을 망각하고 어떤 세력과도 타협해 오직 운중보를 차지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보주는 선선히 용서했다.

“............!”

중의는 뭔가 알지 못할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삼스레 운중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너희들이 있으면 불편하겠지. 허나 이 친구가 따질 일은 아마 너희들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 것이고 너희들도 들어두는 것이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되겠지.”

보주의 마지막 시선은 중의에게 가 꽂혔다. 마주보는 중의는 마치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운중은 이미 자신이 와서 무엇을 상의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우리가 저질러 놓은 일이라네..... 성곤도 마침 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달래듯 말을 하는 운중을 보며 중의는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도 자꾸 위축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쥐어짜듯 한 마디 던졌다.

“자네는 언제까지 참아줄 건가?”

질문은 묘했다. ‘참을 것인가?’가 아니라 ‘참아줄 것인가?’다. 보주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아침 태양이 모습을 보일 때까지......”

이상하게도 보주의 음성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유부의 호곡성처럼 들렸다.

--------------

'확인만 하시오.... 이 속 어딘가에 함정이나 위험한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면 뒤도 돌아다보지 말고 빠져 나오시오.'

자꾸 이곳을 들어오기 전에 한 용추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손번이 붉은 색의 석로를 밟는 순간 또 다시 뭔가 한동안 움직이기 시작했고, 확실히 석로는 방향을 매우 복잡하게 변해버렸다.

‘도대체 이 석로 안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궁금증도 더 커져갔다. 지공은 지하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청력과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발길을 돌린다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다시 되돌아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자신도 없었다.

지금 두 번의 움직임에서 지공은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하석로는 미로(迷路)였다. 그리고 세 가지 색깔이 혼합된 그곳은 뭔가 선택을 위한 장치였다. 그 장치를 두 가지나 밟았고, 밟을 때마다 석로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것이었다. 곧게 뻗은 길에서 벽이 움직여 방향을 틀어버려 선택한 곳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지하에서 아무리 뱅뱅 돌아도 지공은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매우 특이한 본능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 그는 아까 지나온 곳을 다시 지나치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똑같은 길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온 길에 벽이 움직여 갔던 길을 막아 다시 가로로 지나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쉽게 이 석로는 본래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얽혀있는 곳이라고 할 때 가로로 지났던 길의 아주 조그만 부분을 세로로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틀린 느낌이 아니었다. 이미 석로는 그들이 가야할 길을 나들어 놓고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

일각 정도 나아갔을까? 드문드문 있었던 유등이 일장 정도의 거리마다 양쪽에 켜져 있었다. 주위가 갑자기 환해진 느낌이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앞 오장 정도의 거리에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이 보였다.

“뭔가 있겠구려.”

붉은 색의 돌을 밟은 후에 따가운 핀잔을 주었더니 손번은 의기소침해졌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처음 긴장된 음성을 발했다. 그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조심하게.... 이제 시작일 테니까...”

지공은 말과 함께 심호흡을 했다. 두려움이란 것이 모르고 혼자 상상할 때가 더욱 크다. 막상 닥치거나 겪어보면 사실 참을 만한 것이다. 석로 안에서 헤매다가 막상 뭔가 있을 듯한 곳에 오자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우측으로 꺾어지는 곳에 당도해 시선을 우측으로 돌리자 그쪽의 광경은 확실히 그들이 예상하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곳에 온 것이 분명했다.

“석실인가..............?”

석로는 끊겨 있었다. 문이 보였고, 그 안에서는 지금과는 달리 매우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마주보았다. 지공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손번이 앞으로 나서더니 빠르게 석실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동시에 지공 역시 손번의 후방을 지키며 바로 뒤를 따랐다.

그럼에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놀란 것은 두 사람이었다. 대낮과 같이 밝게 켜져 있는 실내는 원형의... 아니 열두 개의 각을 가진 둥근 석실이었다. 두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 열두 개의 석면이었다.

--구룡천하(九龍天下)--

한 면에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세로로 새겨져 있는 글씨는 놀랍게도 그 네 자였다. 그리고 그 네 자가 새겨진 면을 따라 우측으로 인물들의 형상이 정교하게 부조되어 있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벽에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단지 부조되어 있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지공과 손번은 그들의 형상을 하나하나 보아감에 따라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부조되어 있는 인물들 하나같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과 풍모가 뿜어져 쳐다보기조차 두렵고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들고 있었다.

‘허헉--- 구룡(九龍)-----!’

이들 아홉 명의 형상은 바로 구룡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었지만 단지 벽면에 부조된 형상만으로도 그들이 무림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충분했다. 두 사람은 진기를 끌어 올렸다.

#천지#무협소설#이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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