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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곡의 벽을 찾은 순례자들
ⓒ 이승철

비아도로로사에서 통곡의 벽으로 가기 위해서는 역시 좁은 골목길을 가로막은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검문은 형식적으로 하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공항이나 국경검문소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까다롭고 철저했다.

검문소에서 몸과 짐 수색을 하는 군인들은 이스라엘 병사들이었는데, 그들은 몸에 밴 무뚝뚝함과 날카로운 눈초리가 여행객들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도시 안에 있는 작은 성 안에서 이동하는 것인데도 이토록 철저하게 검문을 해야 하는 것이 특수한 이 지역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높은 돌담성벽으로 가로막힌 드넓은 광장이다. 통곡의 벽은 입구의 왼편에 있었다. 역시 높고 단단해 보이는 성벽이었다. 일행들이 다 같이 벽 쪽으로 향하자 가이드가 손을 흔든다.

"이쪽으로는 남성들만 가십시오, 여성들은 저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통곡의 벽을 향한 광장 한쪽이 상당히 높은 목재울타리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 울타리 안쪽이 여성들의 구역이었다. 유대인들의 성소인 통곡의 벽은 남성구역과 여성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통곡의 벽은 본래 유대인들의 성전이었다. 구약성경에는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성전은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인근 레바논에서까지 가져온 가장 귀한 목재로 건축되고 많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호화롭기 짝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성전은 그 후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하여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이 통곡의 벽은 기원전 20년부터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하여 서기 64년에 완공된 제2성전이다. 성전을 완공한 헤롯 아그립바는 헤롯대왕의 부인 마리암의 소생인 아리스토불의 아들이며. 바로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남편 빌립이 죽자 다시 남편의 형인 헤롯 안타파스의 왕비가 된 헤로디아와는 친남매 사이다.

▲ 광장에서 만난 유대인
ⓒ 이승철

▲ 통곡의 벽 돌틈에 끼워 넣은 쪽지 기원문들
ⓒ 이승철

그러니까 헤롯 대왕의 사마리아 출신 첩의 소생인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헤롯 아그립바는 자신의 아버지인 아리스토불이 살해된 후 로마로 보내졌다. 그는 로마의 황실에서 양육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Drusus)와 친구로 성장한다.

그는 성년이 되면서 점차 방탕한 사람이 되어 갔다. 그는 삼촌이자 누이의 남편인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던 팔레스타인으로 갔지만 거기서 헤롯 안티파스왕의 미움을 받게 되어 결국은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서기 36년경 로마로 돌아간 그는 가이우스 가리구라와 친분을 맺었다. 얼마 후 티베리우스황제가 죽었고 그와 가깝게 지냈던 가리구라가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경솔하게도 황제에게 불손한 말을 함부로 하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그는 옥에서 풀려나자 곧 팔레스타인의 빌립이 다스리던 영토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가이우스 가리구라 황제가 미쳐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그 흉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려고 하자, 그것을 말리려고 로마에 찾아가 머무는 동안 가리구라가 죽고 말았다.

헤롯 아그립바는 그동안 로마에서 클라우디오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 중재를 하였는데. 클라우디오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도 그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헤롯대왕(헤롯1세)이 다스리다가 삼촌들이 나누어 통치하던 땅을 그가 모두 통합하여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은 점점 높아만 갔고 이를 감지한 헤롯 아그립바는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성전건축에 박차를 가하여 완공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로마의 신임을 얻고 유대 백성들의 민심을 다스리는 데 아주 귀재였다고 한다.

▲ 벽을 마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 이승철

▲ 통곡의 벽 여성들의 구역
ⓒ 이승철
결국 이 성전은 정통 유대왕가인 하스몬가의 마지막 왕 힐키우스의 신하였으며, 그 하스몬가를 배신하고 로마의 하수인으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었던 헤롯1세(헤롯대왕)가 시작하여, 3세인 헤롯 아그립바 왕이 민심을 얻기 위해 왕권 유지용으로 완공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 화려하고 멋진 성전의 영화로움도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서기 66년부터 시작된 유대 1차 독립 전쟁은 결국 처절한 패배로 끝이 났고,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인들이 쫓기고 쫓겨 마지막에 항전한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 성이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로마군대는 헤롯이 건축한 성전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로마 베스파시안 황제의 아들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였다. 그들은 성전에 불을 질러 헤롯 아그립바 왕이 민심을 얻으려고 건축한 호화롭고 아름답던 성전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것이 서기 70년 아브월(7-8월) 9일이었다

로마가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이 서쪽 벽을 남겨둔 이유는 후세 사람들에게 로마 제국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전한다. 그 후 로마는 이곳 성전 터에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했었으나 성전이 파괴되었던 날에 한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바로 이날 유대인들은 모두 파괴당하고 겨우 한쪽 벽만 남아 있는 이 서쪽 벽 근처에 모여들어 슬퍼하며 통곡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후 아랍의 오마르 왕은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이곳은 2천여년을 나라 없이 세계 각지에서 유랑하다가 1948년 옛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이 이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독립을 선포한 후에도 요르단령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으로 요단강 서안을 점령할 때 격렬한 전투 끝에 이 예루살렘도 점령한 것이다. 유대인들로서는 무려 2천여년 만에 성지를 회복한 셈이었다.

▲ 관광객과 순례자들
ⓒ 이승철
▲ 통곡의 벽 기도실 풍경
ⓒ 이승철

이 통곡의 벽은 폭 60m, 높이 18m로 벽 너머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성지인 그 유명한 황금돔 사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옛 성전터였던 통곡의 벽과 현재 아랍의 이슬람계가 관할하고 있는 황금돔 사원은 거의 붙어 있는 지척의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과 유대,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첨예한 삼각 꼭짓점이 바로 이곳인 셈이었다. 그래서 출입통제도 심하고 검문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침 평일이었고 조금 전까지 궂은 날씨 때문이었는지 통곡의 벽 앞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 일행들은 통곡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기도 하고 몇 사람은 유대인들의 흉내라도 내려는지 쪽지에 무슨 기원을 적어 돌 틈에 끼워 넣는 모습도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통곡의 벽 돌 틈은 작은 쪽지들로 거의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쪽지에는 과연 무슨 기원문들이 기록되어 있을까?

통곡의 벽을 둘러보다가 왼편으로 돌아서자 역시 성벽 밑으로 꽤 넓은 공간이 바라보인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곳은 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주 색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수의 책상과 의자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벽 쪽으로는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도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나 같은 이방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이 정통유대주의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대부분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으며 복장도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유대경전을 펴들고 큰 소리로 읽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또 몇 사람은 바이올린과 작은 관악기 등 각종 악기로 연주를 하고 있어서 제법 넓은 실내가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런 소음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정말 벽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내가 그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살펴보았지만 그들은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조금 여유롭게 실내를 서성이는 중년 남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영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이라고 했다. 50대인 그는 이번이 열다섯 번째 통곡의 벽 방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도 어디서 왔느냐고 반문하여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자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 정통 유대교도들
ⓒ 이승철

▲ 통곡의 벽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 이승철
밖으로 나와 가이드에게 그곳이 무엇 하는 곳이냐고 물으니 통곡의 벽 기도실이라고 한다. 이곳을 찾은 외국 거주 유대인들과 정통유대교도들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로 눈이 내리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도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몇 사람의 외국 관광객들과 유대인 순례자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몇 사람은 주소를 주고받기도 했다. 모두 이국땅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의 깊은 한과 미래를 향한 희망이 깃들어 있는 통곡의 벽을 돌아봄으로써 예루살렘의 관광 일정이 모두 끝났다. 우리들은 사해와 여리고를 거쳐 다시 이집트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통곡의벽,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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