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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 미치는 그곳,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에서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인데, 그곳이 어디인가를 논할 때 "정확히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 "구름 위에 있느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님 나라의 국경인가?"라는 식으로, <소재>를 두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란 바로 하나님 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자리, 모든 시간, 그 모든 가슴과 마음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권이란, 곧 말씀이며 공의이다. 말씀과 공의는 다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생명에 대한 애틋함이다. 부모가 자녀를, 연인이 연인을(소승적 사랑 / 개인 구원), 그리고 이웃이 - 소외되고 억눌린 - 이웃을(대승적 사랑 / 공동체 구원) 사랑할 때.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가 실재, 聖, 생명, 불사의 근원인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우상과 집착

그러나 사랑이 우상이나 집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랑이 되었건 돈이 되었건 그 자체에 참된 기쁨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런 믿음이 바로 우상이며 집착의 시작이다.

우상이란 인간이 돈, 이념 등 상대적인 것, 혹은 수단일 뿐인 것을 절대화할 때 빠지게 되는 오류이며, 집착이란 가지려 하고 소유하려 드는 마음이자,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의 상태이다.

우상, 집착은 고통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평소 돈이나 학벌, 직업, 키, 외모 같은 것에, 조건에 아무런 생각도 없고 욕심도 없었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느 이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성은 탁월한 조건을 갖고 있다. “저 사람과 사랑을 이뤄야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는 이 사람은 이제 - 그 이성이나 그 외 다른 누구도 그의 외모, 학력, 직업 등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 자신의 온갖 조건을 돌아보며, 생전 관심도 없었던 것들에 결핍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이를 채우려 들며 고통받게 된다. 하나의 집착이 또 다른 집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아저씨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바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예수의 음성과 또 그의 삶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은혜와 긍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작고 약한 자 하나하나를 작은 예수로 귀히 여기며, 신이 인간을 사랑하듯이 우리도 그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에게서 받은 사랑 그대로 은혜와 긍휼로 그들을 아끼고 보듬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살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에 아무 이유가 없듯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하되 “바로 거기에, 그것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을 것”이라 여기지 말고, 갖으려,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냥 사랑하는 것, 어떤 이유나 의도, 목적 없이 아끼는 것, 있는 그대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구속이나 제약이 되지 않고 자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생명이 있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랑의 폭이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점차 피아, 너와 나, 너희와 우리를 구분 짓는 울타리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거리에서 스쳐지나는 사람들, 무수한 이들의 신음을 듣게 되고 그 아픔을 공감하면서 “내”가 아닌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그들”이 된다.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죽음(하데스) 한가운데로 하강하고, 마찬가지로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죄와 유혹과 고통과 죽음에 자신을 던졌던 것과 같이.

사랑과 구원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

이제 더는 무심히 지나치던 거리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되고, 무의미한 덩어리일 뿐이던 익명의 군중이 하나하나가 특별한 존재로서 보이게 되면서, 무심히 흐르고 흐를 뿐이던 kronos(희랍어로 흐르고 흐르는 일반적 시간을 의미)의 시간이, 이제 매순간 또 모든 자리 - 그리고 그 모든 자리에 마주앉은 사람이 - 가 운명적인 시간인 kairos(희랍어로 운명적인 순간, 극한과 절체절명의 기로를 의미)의 시간으로 변화한다.

바로 이것이 생명에 대한 사랑이며 생명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이야말로 하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하늘의 마음을 가질 때, 그때, 그 자리, 그 시간, 그 마음이 바로 중심,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과 구원을, 그간 우리는 뿌연 거울 너머에 아른거리는 형상 보듯 추상적인 것으로 제한해 오지는 않았는지.

끝으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그들의 사랑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불완전한 것, 불완전한 사랑에 구원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그래서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이건 불교이건 이슬람교이건 이들 종교가 바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리라. 예컨대 한반도에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과 예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 사이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러니 타종교를 비방하고, 내 종교에만 구원이 있으며, 다른 종교는 모두 지옥에 간다는 식의 생각은 지양해야 한다. 그런 식의 판단은 미신적 편견인 동시에 월권이다. 우리가 무엇이건 데 감히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신, 하늘이 판단할 부분이다. 지극히 좁고 얕은 우리 인간의 지경으로 판단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그:#기독교, #예수, #사랑, #구원,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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