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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육지 면적의 5.6%를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와 본토만도 전 세계인구의 21.6%에 달하는 5천년 역사의 나라 중화인민공화국.

일찍이 몽골제국의 전성시대에는 이슬람권인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휩쓸고 볼가강을 건너 러시아와 폴란드까지 굴복시킴으로써 기독교세계인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유라시아의 정복지를 거대한 4개의 칸국(汗國)으로 분할해 지배했던 뿌리 깊은 군벌주의적 전통의 타타르제국.

유럽에서는 구스타프스 아돌프스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시대에나 출현한 국민군체계에 입각한 총력전방식을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화시켰던 군사대국.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꽃피웠던 제자백가의 사상은 14세기에서 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보다 무려 2000년이나 앞섰던 문화선진국.

6세기 말경인 수나라 양제 때 이미 남쪽의 양자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인 1794Km에 달하는 대운하를 건설했으며 11세기 후반의 거대한 제철산업은 영국 산업혁명 초기의 철 생산량보다 많은 연간 12만 톤에 달할 정도로 16세기까지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던 경제대국.

세계 4대 발명품인 종이·인쇄술·화약·나침판 등을 모두 최초로 발명하고 유럽이 르네상스 이전까지 주석과 유리그릇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세계 최고의 도자기인 청화백자를 사용했던 수준 높은 문명국.

15세기 초 명나라 해군은 길이 120m 중량 1500톤이나 되는 대형 전함을 1350척이나 보유할 정도로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했으며, 특히 정화제독이 이끈 함대는 300여 척의 함선에 2만8천여 명의 선원을 태우고 7차에 걸친 대원정을 실시, 컬럼버스보다 71년이나 앞선 1421년 이미 아메리카대륙을 다녀갔고 마젤란보다 98년 먼저 지구를 일주했으며 바스코 다가마보다 80년 빨리 인도양을 항해했다. 뿐만 아니라 쿡 선장보다 300년 먼저 호주에 첫발을 내디뎠고 유럽인들보다 무려 400년을 앞서 북극해와 남극대륙을 탐사했던 탐험의 나라.

그래서 나폴레옹도 "거대한 사자가 잠자고 있다. 중국을 계속 잠들게 하라, 왜냐하면 중국이 기지개를 펴며 잠에서 깨어날 때 세계가 요동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의 두려움의 대상인 나라.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이 격은 지난 150여 년간의 수치는 돌연변이 적인 것이다.

중국사에서 가장 국제적이었던 몽골제국만을 예로 들더라도 몽골군은 25년 동안 로마군이 400년간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정복해 인류사 최초의 실질적인 세계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제법·선거·공립학교·우편제도·대포·주판·실크로드의 복원을 통한 자유무역지대의 건설 등 근대적 문물의 태동을 불러왔다. 몽골제국의 말발굽은 문명을 실어 나르고 교류시키고 융합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계사적 위업은 700년 동안 깡그리 잊혀졌으며 몽골제국은 피에 굶주린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묘사돼 왔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서유럽에 의해 주도돼 왔지만 사실 몽골제국 당시의 서유럽은 가져갈 게 없어 건드리지 않은 궁핍한 땅에 불과했다.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태풍이 당시 지구상에 존재했던 3개의 세계, 즉 중화세계와 이슬람세계, 그리고 동유럽세계를 강타하고 지배하고 있을 때 오직 서유럽만이 이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서유럽은 이들 세계의 파멸로 인해 이익을 보았다. 몽골제국에 의해 중국과 이슬람 그리고 서유럽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태풍으로 인해 상류에 있던 온갖 잔해들이 하류로 떠내려 오듯 유럽 동쪽의 각종 문화와 산물들이 서유럽으로 떠내려 왔다. 따라서 수준 높은 문물을 자랑하던 아랍이 몽골제국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본 반면, 유럽은 피해는 보지 않고 몽골제국이 뚫어놓은 길로 들어오는 문명의 혜택만 본 것이다.

그래서 "근대의 세계체제는 유럽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바로 몽골제국의 산물"이라는 이마뉴얼 월러스틴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서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산업혁명 이후부터인 반면, 중국대륙은 선사시대부터 세계 4대 문명권 중 하나인 황하문명을 기원으로 지난 수천 년간 유럽 어느 지역보다 부유했고 발전했으며 국제적이었다. 1500년경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라야 인구 15만 명의 나폴리가 고작이었지만 같은 시기 중국 장안은 200만 명의 과세 대상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지난 수천 년간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서 천자(天子)의 통치를 받지 않는 만리장성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그런 지역의 사람들은 천자의 은총을 받지 못한 야만인들로서 문명의 울타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중화제국 밖의 어떠한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도 그들이 자신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고는 수직적이었으며 국제관계도 국내정치의 유교적 구조와 질서처럼 수직적으로 인식되고 운영되었다.

그러므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1793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사절단이 청나라의 문호를 열기 위해 건륭제를 알현하면서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삼배구고(三跪九叩)의 예(禮)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수천 년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는 전 세계 GDP의 2/3 이상을 차지해 왔으며 상당한 부분을 유럽에게 강탈당한 1820년까지도 여전히 세계 GDP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은 유사 이래로 계속 제국(帝國)이었으며 대몽골제국은 알렉산더제국의 2배에 달했고 로마제국에는 3배에 달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패배로 열강들에 의해 반식민지상태에 빠지면서부터 중·일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할 때까지 오직 한번을 제외하고는 항상 주도적 문명권으로서 세계의 중심이었다.

사실 중국역사에서 동이·서융·남만·북적(東夷·西戎·南蠻·北狄) 등 자신들과 생활터전을 같이했던 황하문명권내의 민족들이 아닌 전혀 다른 족속들에게 한 세기 동안 그렇게 처참하게 난도질을 당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중국의 우수성에 대한 신성모독이고 모든 중국인에 대한 개인적 모욕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워져야만 하는 역사이며 역사적 가해자는 응징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 가해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영국·일본·러시아 그리고 미국이다.

영국은 아편전쟁 이래로 중국의 품위를 수치스러울 정도로 떨어뜨렸기 때문이며, 일본은 침략전쟁을 일으켜 중국인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으면서도 아직까지 반성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또 다시 약탈할 궁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6세기 말 코사크 부랑자들의 두목 엘마크가 그의 약탈대를 이끌고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도망친 이래 헤아릴 수 없이 광활한 중국의 북쪽 영토를 주인 없는 땅이라고 우기며 지속적으로 잠식해 왔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아시아에 들어와서 일본을 키워 중국과 철전지 원수로 만들더니 최근에는 다시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중국 위협론을 과장시킴으로써 중국의 대외적 야심을 직·간접적으로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네 열강 중 둘은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영국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니며 홍콩에서 내려진 '유니언 잭'은 고통스런 역사의 한 장에 종언을 고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여전히 인접해 있지만 더 이상 제국이 아니며 지위와 위세 그리고 영토의 측면에서 현저히 위축되어 있다.

결국 중국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이다. 따라서 이 두 국가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중국의 지역적 역할과 세계적 역할이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은 일차적으로 중국 자신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군사·경제적 힘을 가지게 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중국위협론#잠자는 사자#정화의 대원정#몽골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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