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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Erie) 호의 일몰. 강한 사람은 배려하는 사람이고, 배려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임을 깨달았다.
ⓒ 문종성
당신은 같은 분야에서 절대고수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버팔로를 빠져나가다 시내 도로란 도로를 다 막아버리고서 펼쳐진 'Gus Macker'라는 길거리 3:3 농구 축제를 본 후 이제 이리(Erie)호를 따라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이었다.

철강산업의 선두주자였던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게 녹슬어버린 버팔로의 외곽지대는 보는 것 자체가 피로할 정도로 황폐해 보였다. 흑인 밀집가의 가난해 보이는 한 아이는 도심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혼자서 연신 농구공을 매만지며 슛 연습을 하고 있다. 함께 놀아줄까하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아이의 모습에서 많이 밀려가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만남에 대한 기대도 피로와 귀찮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4차원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이리(Erie)호. 하늘로부터 빨주노초파남보 빛들이 일제히 호수를 향해 다이빙을 한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건 단지 초록색 녀석. 타다 남은 재를 뒤져 꿈의 알갱이들을 찾아내려는 완벽주의 같은 나지만 호수가 온통 푸른색으로 보이는 이유를 굳이 복잡한 과학이론에 접목시켜 바라볼 만큼 얽매이고 싶지 않다. 질리도록 복잡한 대한민국을 떠나 마음껏 단순함을 느끼기 위해 떠나온 길 아닌가. 다만 가슴을 트이게 하는 바다같은 호수에서 청록의 시원함에 그저 폐부 깊숙이 상쾌한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이 감사할 따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머리로는 신승훈의 마이너풍 슬픈 발라드를 들으면서 다리로는 페달을 열나게 밟고 있으니 내 처지가 꼭 백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그 고운 자태를 뽐내면서도 수면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게 물갈퀴질을 해대는 부조화의 모습. 그러나 성공학 이론에 따르면 바삐 움직이는 그 물갈퀴질로 인해 비로소 우아한 자태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하니 자전거를 타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를 듣는 것도 멋진 여행 중 하나의 행복이라 여겨진다.

▲ 우연히 만난 라이더 게리. 그의 밥야크 트레일러가 멋있다.
ⓒ 문종성
오전부터 오후까지 별다른 일 없이 라이딩을 하다 드디어 처음으로 장거리 라이더와 마주쳤다. 밥야크 트레일러를 끌고 가는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강호 고수의 티가 나는 베테랑임이 분명했다. 나는 서쪽으로, 그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서로 마주치자 간단히 인사만 할 참이었는데 내가 핸들을 꺾는 순간 그 역시 핸들을 돌리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오우~ 밥 야크(bob yak) 트레일러잖아요? 정말 멋지군요. 나도 이걸 구입할까 고민하다 결국 패니어를 선택했는데."
내가 먼저 그의 트레일러에 대해 칭찬하니 그 역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놀라워했다.
"세계를 돈다구요? 대단하군요. 난 이리(Erie)에서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 쪽으로 가는 중이에요.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아요."

▲ 핸들에 다는 거울 대신 그는 고글에 거울을 달아 편하게 뒤를 볼 수 있다고 한다.
ⓒ 문종성
그는 일주일 간 약 800km 정도에 이르는 거리를 여행하는 중이었고 오늘이 첫 날이었다. 내가 자전거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 트레일러와 패니어 사이에 고민하면서 알아본 정보들이 있었기에 그에게 말하면서 크게 틀리진 않았다. 그는 나완 다르게 패니어보단 트레일러를 더 선호한다. 무게가 더 나가긴 하지만 이것저것 물품들을 더 많이 담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며칠 걸리는 여정인지라 트레일러에 짐이 가득하다. 그의 이름은 게리(Gerry Mullen). 컴퓨터 프로그래머이고 56세란다.

"정말이에요? 난 45세 정도로 봤는데."
게리가 크게 웃는다. 그리곤 고맙다면서 흐뭇해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까지 갈 예정인가요? 혹시 이리 타운까지 가나요?"
"네, 아마."
"그래요? 그렇다면 오늘 밤 우리집에서 자고 가요. 우리 딸이 둘 있는데 아마 갈렙을 편안하게 재워줄 거예요. 내가 지금 캐나다 가는 중이니 우리 집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줄게요."

그가 먼저 호의를 베풀었다. 게리에겐 대학생 딸과 대학을 갓 졸업한 딸이 있었는데,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 쪽으로 가는 중이니 집에 들르거든 잘 보살펴 주라고 딸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지만 웬일인지 집과 핸드폰 모두 불통이다. 몇 차례 전화통화를 해도 그의 딸과 연결되지 않자 그는 결심을 한 듯 보였다.

"이봐요 갈렙. 좋아요. 우리 딸이 전화를 받지 않는군요. 딸에게 말해서 오늘 밤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려고 했는데 지금 아무도 없나 봐요."
그는 살짝 난처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교차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에게 나 때문에 괜히 부담을 안겨줄 수는 없는 일.
"괜찮아요. 난 정말 괜찮아요. 얼마든지 그런 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암튼 정말 고마워요."

▲ 트레일러를 달고 가는 게리의 자전거와 패니어를 달고 가는 내 자전거.
ⓒ 문종성
난 그렇게 친절히 배려를 해 주는 자체만으로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게리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니요. 그게 아니에요, 갈렙. 음. 아무래도 내가 오늘 당신을 책임져야 될 것 같아요. 집 떠난 지 세 시간 밖에 되지 않았으니 뭐 다시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상관은 없거든요. 집으로 그냥 돌아가겠어요. 갈렙이 나를 따라와요."
"네? 아니 저… 그게 진짜… 난 괜찮은데? 저 때문에 괜히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잖아요? 그냥 가도 괜찮아요. 난 혼자서도 뭐든 불편함 없이 잘 할 수 있어요."

당황하는 나에게 게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의 매듭을 지어버렸다.

"좋은 친구를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순 없잖아요? 인연은 쉽게 만들어지는 법이 아니에요. 나를 따라와요. 당신을 만나 나도 기뻐요. 그래서 대접해 주려는 거예요. 집까지 세 시간 정도면 되니까 그리 멀지는 않아요."

부드러움 속에서도 게리의 의지는 결연해 보였다. 이런 고마울 데가. 미안하면서도 고마우면서도 왠지 그와 있으면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그의 의견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정을 과감히 포기하면서까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여유와 배려를 바라보자니 심연보다 깊은 가슴 저 밑에서부터 존경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까지 가는 세시간 동안 이리 호 주변에 대해 짤막짤막하게 설명을 계속해주었다. 지난 번 온타리오 호수에서는 사과 농장을 많이 봤었는데 여기선 특히 포도 등 과일 농장들이 많이 보인다.

"천연 호수에 상쾌한 바람에 질 좋은 토양까지 있어서 포도 맛이 일품이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호수 바람을 타고 온 진한 포도 향기에 그만 취할 정도니까.

▲ 그의 집 안에 있는 자전거 형상 장식물.
ⓒ 문종성
30km를 넘게 달려 그의 집에 도착해서 먼저 샤워부터 했다. 그리고는 그는 나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가서 치킨 샌드위치를 사주었는데 정말 지금까지 맛 본 치킨 샌드위치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맥도날드나 버거킹에서 파는 치킨 샌드위치가 표현할 수 없는 맛의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야말로 육질이 담백하니 살아있었다. 한 입 베어 물을 때마다 눈물겨운 분투로 자신의 육질을 매끈하게 다듬어 자라온 어느 닭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느껴진다는 표현이 터무니없다고 해도 난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게리는 베지테리안(채식주의자)이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는단다. 그는 내가 감격해하며 맛있게 치킨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한다.

▲ 게리와 그의 두 딸의 식사하는 모습. 아버지는 베지테리안이지만 딸들은 그렇지 않다.
ⓒ 문종성
식사 후 장을 보고 집에 도착하니 딸들이 와 있었다. 딸은 두 명인데 언니 타라(Tara)는 올해 대학을 졸업했고, 동생 켈리(Kelly)는 아직 대학 재학 중이었다. 문득 아까 게리의 제안이 떠올랐다. '딸 둘이 있는데 내가 없더라도 우리 집에 가서 오늘 밤 가고 가요'. 게리는 나를 신뢰했던 것이다. 딸 둘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기꺼이 자신의 집에 재우려고 했다. 비록 다른 방에서 자는 거라지만 여하튼 쉽게 허용하기 힘든 딸과의 동침 아닌가. 그렇다면 내 인상이 좋은 건가? 얼핏 들었었다. '네 얼굴은 산에 가면 산적, 바다에 가면 해적, 돌아다니면 강도 같은 얼굴'이라고. 그래서 나를 믿어주는 게리가 고맙기만 하다.

그의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사별인지 이혼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게리가 말하지 않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저녁에는 누가 찾아왔다. 마시(Marcy)라는 중년 여성인데 게리의 여자친구로 보였다. 역시나 맞았다. 내 생각에는 그가 특별히 아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아 이혼한 듯 보였다. 사별이라면 굳이 감출 필요까진 없었으므로.

▲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미국 애국가를 잔잔히 부르는 사람들. 어쩐지 애달프게 느껴졌다.
ⓒ 문종성
마시는 내게 자기들과 함께 이리 호의 환상적인 일몰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스크림도 먹을 겸 말이다. 어차피 혼자 있기에 심심한 몸. 당연히 따라 가기로 한다. 이리 호의 일몰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다. 지평선 위로 새들이 날아가고 파도가 치는 모습이 사뭇 낭만적이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감상에 도취된 듯하다.

높게 떠 있다고 생각했던 붉은 노을은 사진 몇 번 찍자마자 금방 호수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그런 풍경 속에 어디선가 선 가는 노래가 들려온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망대에 앉아 미국 애국가(National Anthem)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들이 한 곡을 다 부르고 나자 좋았다고 말해줬다. 미국의 애국가는 장중하면서도 애달픈면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스포츠 경기를 하기 전이나 태양이 지는 일몰 상황에서 불러도 잘 어울린다.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듣던 애국가나 지금 호수의 일몰을 바라보면서 듣던 애국가는 인간 본연의 하나의 느낌에서 여러 변곡점을 만들어 마치 감정의 스펙트럼을 분산시켜 살려내는 듯하다.

▲ 등반 장비들. 그는 등반 뿐 아니라 오토바이 타는 것도 좋아한다. 더 많은 장비들이 거실 한 켠에 가득하다.
ⓒ 문종성
호숫가는 바람도 시원하고 무엇보다 모기가 없어서 좋았다. 오렌지 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림픽과 월드컵까지 치렀기에 어느 정도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개고기와 군대 월급, 그리고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그들은 꽤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한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 자신도 미국의 장점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컬한 모순과 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그 정도쯤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게리는 자전거뿐만 아니라 BMW를 소유하고 있는 오토바이 마니아이고, 산악 암벽타기를 즐겨하는 산악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은 자전거를 탈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는 스포츠에 대해선 상당한 이론과 실력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의 전문가적인 식견과 집에 있는 각종 전문 스포츠 용품, 그리고 그의 그간의 행적들이 그걸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자랑으로 떠들어 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임계점을 알고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자전거에 대해 나보다 훨씬 세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내게 적절한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하수를 제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고수가 아니다. 진정한 강호 고수는 하수를 배려할 때 그 진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애송이같은 자전거 여행자를 그냥 지나쳤다면 우리 인연은 없었을 것이고, 난 또 하나의 깨달음을 놓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훨씬 성숙한 인간미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비교와 판단의 잣대로 생각해 무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 이것이 그가 가진 강력한 힘인 것이다.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힘.

다음 날 아침, 그는 캐나다 자전거 여행을 포기하고 회사 출근까지 미루면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짧지만 흥겨웠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그와 헤어지면서 생각해 본다. 나는 언제쯤 여행자로써 강호 고수가 될 수 있을까.

같은 하늘 아래 자신의 잘났음을 애써 주장하며 상대방을 뭉개버리는 사람과 자신의 탁월한 장점마저도 보이지 않게 감추며 상대방을 세워줄 수 있는 사람. 난 어느 편인가. 내 안에 물음에 차마 대답을 못하겠다. 생각할수록 침울해지고 부끄러워진다. 그 부끄러움이 이리 호 바람에 씻겨 갈 때까지 페달을 밟고 또 밟는다.

▲ 나는 언제쯤 고수가 될 수 있을까? 이기는 사람보다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문종성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여행, #자전거, #이리호, #고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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