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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에 노을이 지고 있다.
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에 노을이 지고 있다. ⓒ 최성수
백야의 밤, 나는 앙가라 강가에 서서 바이칼을 빠져나와 시베리아 평원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막막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강가에는 러시아 젊은이들이 생의 한 순간을 흘려보낼 수 없다는 듯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데, 밤 열 시가 지난 시간에 노을이 하늘 저편으로 걸리기 시작했다.

낯설었다. 모든 것이 다 낯설었다. 몽골의 황막한 사막도, 러시아의 빽빽한 자작나무 숲도, 한밤중에도 환한 백야도 모두 낯선 풍경들이었다.

그 풍경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상상 속에서도 떠올려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내 상상 속에는 내가 지금까지 발 딛고 살아온 것에 기반을 둔 몽골이 있고, 이르쿠츠크가 있을 뿐이었다. 상상이란 얼마나 사실과 먼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강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내 귀에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차 소리 같았다. 금방 그치겠거니 하고 여전히 상념에 잠겨있었는데, 한참을 지나도 그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는 앙가라 강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내는 것이었다. 소리가 난 뒤 한참을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차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긴 기차인가? 나는 중간부터 기차가 몇 량이나 되나 세어보기 시작했다. 하도 길어 숫자가 틀렸을 수도 있을 테지만, 하여튼 그날 내가 세었던 것은 칠십 몇 까지였다. 저렇게 많은 칸을 달고 저 기차는 얼마나 아득한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그 기차가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였다.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9466㎞나 되는 길을 달리는 철길, 그 길이만큼 달고 다니는 칸도 많았다.

아득하게 달리는 기차,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다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토르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표지판.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토르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표지판. ⓒ 최성수
나는 기차가 지나간 철교를 바라보며 그제야 내 낯섦의 원인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내 낯섦은 지리적·환경적 이질감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 뿌리는 고립으부터 오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동쪽 출발점은 블라디보스토크다. 열차는 이곳을 출발해서 모스크바까지 러시아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그 사이에 하바로프스크가 있고, 울란우데가 있고, 이르쿠츠크가 있고, 이름조차 처음 듣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이어져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길이 그냥 러시아의 동서를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라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저 남의 나라에 있는 긴 철길이라면 지금 이 땅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동쪽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하산까지 이어져 있다. 하산이라는 러시아 땅에서 강 하나를 건너면 북한이다. 두만강 건너 나진과 이웃해 있는 철로인 셈이다.

그 서쪽 끝은 바르샤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연결된다. 그러니 이 시베리아 철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대륙의 길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남녘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의 베를린까지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이어져 있으니, 우리에게는 꿈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은 사람의 삶을 규정한다.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을 다니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에 눈뜨고, 문화와 생각을 나누게 된다. 그래서 삶의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있던 길이 막히면, 길의 사고도 끊어지게 된다. 끊어진 길 위에서의 삶은 고립된 물과 같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바로 그렇다.

우리의 길은 휴전선에서 끊겼다

역 주변의 풍경들.
역 주변의 풍경들. ⓒ 최성수
남북이 분단된 뒤 우리의 길은 휴전선에서 끊긴다. 그 단절은 단순히 길의 단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길의 단절은 삶의 단절을 불러오고, 문화의 의식의 단절로 이어진다.

중학생 무렵, 이광수의 <유정>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나는 주인공 최석이 이르쿠츠크에서 보낸 편지의 바이칼 묘사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이르쿠츠크는 내게는 의미 없는 낯선 땅일 뿐이고, 바이칼은 나와 무관한 지역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무의미한 그 지역이, 소설을 쓰던 이광수를 비롯한 식민지 시대 사람들에게는 현실적 삶의 공간이었음을, 그 뒤 역사를 배우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바로프스크니 이르쿠츠크니 하는 지명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활동 거점이었으니 말이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우리나라에서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니 하바로프스크니 하는 곳으로 독립 투쟁을 떠났다. 특히 이르쿠츠크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조직인 이르쿠츠크파의 핵심 근거지였다.

1918년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독립 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한인사회당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갈라지고 만다. 같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 조직이었지만 상해 임시 정부에 참여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 결과였다.

이르쿠츠크파는 상해 임시정부 참여를 반대했고, 상해파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핵심 인물은 남만춘과 한규선 등이었고 상해파의 핵심 인물은 이동휘였다. 이르쿠츠크파에는 여운형이나 박헌영 같은 인물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서로 갈라진 두 세력은 각각 따로 당 대회를 열고 결별의 길을 걷게 된다.

독립운동의 흔적은 이르쿠츠크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하바로프스크니 알렉세예프스크, 울란우덴 등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길을 따라 숱한 곳에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삶이 배어 있다. 그 길에는 식민지 조국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삶 전부를 바친 투사들의 혼이 스며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억압을 피해 새로운 삶터를 일구기 위해 떠났던 수많은 선조들의 신산한 삶이 깃든 길이기도 하다.

독립의 길, 유랑의 길

러시아 국경을 넘으면 기차는 몽골 땅에 들어선다. 울란우덴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가는 길과 갈라진 기차는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향한다. 몽골 어느 역의 풍경.
러시아 국경을 넘으면 기차는 몽골 땅에 들어선다. 울란우덴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가는 길과 갈라진 기차는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향한다. 몽골 어느 역의 풍경. ⓒ 최성수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해주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부터라고 한다. 가난한 살림의 탈출구로 찾은 그 땅에서 천신만고 뿌리를 내리고 살던 그들은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이 13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동쪽 출발지인 연해주 지역은 이처럼 독립 운동의 근거지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생활 터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끌던 당시 소련은 이 지역의 고려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편다.

당시 소련은 극동지역에 일본이 침략할 경우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1937년부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고려인들을 쫒아낸다. 이 시기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이 약 25만 명이라고 한다. 자기 나라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낯선 곳에 발 디디며 근근이 마련한 삶터에서 또 쫓겨나야 했던 고려인의 신산한 삶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몇 날 몇 밤 캄캄한 불안 속을 헤매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같은 낯 선 땅에 버려졌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얼마나 피 맺힌 한의 길이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또 한 번 고려인의 비극을 불러온다. 낯선 땅에서 천신만고 끝에 겨우 뿌리를 내렸지만,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는 곳이 또 다른 독립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독립된 그 나라들이 극도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펴면서, 소수 민족이었던 고려인들은 견딜 수 없는 시련과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많은 고려인들이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옛 삶터였던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또 이주를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만다.

한 가족이 다 옮겨 다닐 수 없어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서로 다른 나라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서로의 소식조차 제대로 전할 수 없고, 국가간의 외교 문제로 여권을 낼 수조차 없어 한 번 헤어지고는 영영 만나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산의 비극을 맞게 되었으니, 고려인들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유랑의 열차이면서 동시에 고통의 열차인 셈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는 역 주변의 허름한 시장 풍경, 허름하지만, 돌아보는 마음은 느긋하고 넉넉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는 역 주변의 허름한 시장 풍경, 허름하지만, 돌아보는 마음은 느긋하고 넉넉하다. ⓒ 최성수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만든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긴 철길인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건설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당시 우랄 산맥 서쪽에 집중되어있던 정치적 영향력을 미지의 땅 시베리아로 넓히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철길을 연결한다면, 그들의 영향력은 일본이나 중국, 조선 등과 같은 나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동진정책의 수단으로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이 추진된 것이다.

아울러 버려진 땅이었던 시베리아에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는 천연가스나 석유를 효과적으로 수송할 수 있으며, 중앙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던 인구들 시베리아 쪽으로 분산 이주시킴으로써 방대한 러시아 국토를 효과적으로 재편,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은 1891년 알렉산드르 3세가 공포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칙령'에 의해 추진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착공식을 갖고 공사가 시작된 지 약 25년만인 1916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애초 1년 6개월 만에 완공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으로 추진되었던 공사는 그 열 배 가까운 시간이 걸릴 만큼 힘들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공사의 핵심 인물은 칙령을 반포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니콜라이 2세였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공사의 전 기간을 책임지는 실권자였다.

그는 실제 1891년의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그리스, 홍콩, 일본을 거치는 방대한 여정에 나섰다. 일본에 머물 때는 일본 경찰의 저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기공식에 참석한 그의 첫 삽으로 비로소 9288㎞의 길고도 험한 철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 기간 니콜라이는 황제가 되었고, 숙원 사업이던 철도는 그의 재임 기간 중인 1916년 10월 18일 완공된다. 그러나 철도 완공 약 4개월 뒤인 1917년 3월 2일 그는 2월 혁명의 결과로 황제에서 폐위되고 만다.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그는 자신이 건설의 중심이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우랄 산맥 근처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고 만다. 그의 딸이 바로 아나스타샤 공주였다.

니콜라이 2세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의 핵심 인물이었다면, 건설의 실질적 담당자는 세르게이 비테였다. 그는 러시아의 교통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횡단 철도 건설을 계획하고, 예산을 확보하는 등 모든 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니콜라이 2세를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천한 것도 그였다. 비테가 없었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은 아마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유럽으로 길을 잇는다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 관광의 핵심 바이칼의 알흔 섬 풍경. 이곳이 몽골리안의 시원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관광의 핵심 바이칼의 알흔 섬 풍경. 이곳이 몽골리안의 시원지다. ⓒ 최성수
시베리아 횡단 철도건설 비용은 총 10억 루블이었으며, ㎞당 약 7만 2천 루블이 들었다고 한다. 가장 난공사였던 바이칼 호수를 지나는 구간은 ㎞당 20만 6천 루블이 소용되었다고 하니, 그 막대한 비용을 짐작할 수 있다. 비테는 그 비용을 국가 재정을 통해 확보하고, 공사를 추진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의 이름 없는 주인공들은 어쩌면 이 철길 건설에 몸으로 뛰어들었던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일 지도 모른다. 15년간 연인원 약 10만 여명이 동원되었는데, 러시아 노동자뿐만 아니라 군인,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던 죄수들이 그들이었다. 중국과 인접한 구역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바이칼 부근의 암석 지대

사에는 알바니아와 이탈리아 기술자들이 참여했다. 공사 기간 중 사망한 인원만도 만 여 명이었다고 한다. 숱한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 목숨을 담보로 건설된 것이 바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옮겨가기도 했고, 빼앗긴 조국을 찾는 독립 투쟁의 길에 나서기도 했고, 혹은 동토의 땅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이 길이 역사의 길이면서 생존의 길인 셈이었다.

이제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와 우리 한반도 종단철도(TKR) 연결이 한국과 러시아의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유럽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경제적 이득을 넘어 통일의 길로 가는 열차

환바이칼 열차가 지나는 어느 마을 풍경. 석유를 퍼 올리는 것일까? 바이칼의 지하자원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세상 곳곳으로 운송된다.
환바이칼 열차가 지나는 어느 마을 풍경. 석유를 퍼 올리는 것일까? 바이칼의 지하자원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세상 곳곳으로 운송된다. ⓒ 최성수
끊어진 길을 잇자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득 때문이다. 한국 종단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잇게 되면 물류 유통을 통해 얻게 되는 경제적 이득이 막대하다는 것이 주된 논리다.

두 철길의 연결이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철길이 열리게 되면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삶의 전통은 일순간에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다. 실제 이 철길 주변 반경 1200㎞ 내외에 약 7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문화나 삶의 환경은 무차별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되는 온갖 유행과 풍조에 의해 획일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길은 이동을 전제로 한다. 그 이동은 사람의 이동뿐만 아니라 가치와 의식의 이동까지 포함한다. 식민지 시대 독립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은 우리 땅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연해주로 떠났다.

또 식민의 땅에서 발 딛고 살 수 없었던 곤고한 민중들은 새 삶터를 찾아 보따리를 싸들고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었다. 그들의 의식 속의 공간은 결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제한적 공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주로 시베리아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는 현실은 의식의 확대를 지니게 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남북의 분단은 이러한 의식의 확대를 차단시키고 말았다. 남쪽 땅에서 기차를 타고는 겨우 경기도나 강원도 북부까지만 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우리의 삶을 한계화시키고 만 것이다. 분단은 현실적 통행 제한뿐만 아니라 의식의 고립화까지 가져온 것이다. 분단 현실은 지리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남북 철도가 시험적으로나마 운행되었다. 그 시험이 일상적인 연결로 이어질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러시아와의 철도 연결 추진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TKR-TSR의 연결은 단순한 길의 연결이 아니다. 그것은 남북한의 평화 구축의 길이며 동시에 '철의 실크로드'인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연결을 통한 의식의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산적한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남북한의 정치적, 군사적 평화 체제 구축이나 혹은 낙후된 북한 철도의 개선과 같은 기술적 문제들은 철도 연결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다. 그러니 철도 연결 자체가 곧 남북 평화 체제 구축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한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미래를 여는 길인 셈이다.

철마도 달리고, 나도 달리는 그 날

몽골 고비 사막을 떠도는 낙타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면 우리 또한 세상을 떠도는 낙타와 같은 존재가 된다.
몽골 고비 사막을 떠도는 낙타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면 우리 또한 세상을 떠도는 낙타와 같은 존재가 된다. ⓒ 최성수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아주 적은 일부분만을 달려보았다.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토르까지의 길이 그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길은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를 거쳐 울란우덴에 이르면 두 갈래로 나뉜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닿고, 남쪽으로 가면 몽골을 지나 중국 북경에 이른다.

내가 간 길은 이르쿠츠크-울란우덴-나우스키-수호바타르-울란바타르를 거치는 부분이었다. 나는 서른 시간이 넘도록 기차를 타면서, 전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갈 꿈을 꾸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을 거쳐 나진, 하산,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아니 거기서 더 이어져 유럽까지 가보는 꿈이었다.

서른 시간 남짓한 시간조차 내가 꿈꾸는 길을 갈 시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이리라. 서너 시간만 기차를 타도 지루해 하는 국내 여행의 습관은 끊어진 길 위에 사는 삶이 내 의식을 한계화 시킨 탓이리라. TKR에서 TSR로 이어지는 그 길은 열 배도 더 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열 배도 넘는 시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부풀고 머리가 환하게 비어오는 것 같다.

길 앞에 선 사람은 누구나 꿈꾸기 마련이다. 우리 땅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꿈,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거쳐 남으로 달려 중국 운남성을 지나 베트남이나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로 떠나는 꿈. 그 꿈은 단절된 의식을 복원하는 꿈이며, 분단의 의식을 극복하는 꿈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일부 구간을 달리던 그 여름의 몇 날이 그립다. 침대칸에 누워 바라다보면 아득하게 펼쳐진 들판과 그 들판을 흘러가던 물길, 주변으로 칭칭 늘어진 버드나무 숲과 그 풍경 속에 순하게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눈에 선하다. 그 그리운 풍경을 찾아 이제는 서울역쯤에서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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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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