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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의 위용을 파악한 듯 흑백쌍용의 기세는 더욱 맹렬하고 음험해서 기세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난 나무토막과 함께 먼지들이 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안되겠다…!’

순간 백도는 생각을 바꾸었다. 점점 흉험해지는 상황인지라 사부의 시신이 놓여있는 이곳에서 드잡이질을 계속한다면 안이 온통 망가질 것이 뻔했고, 사부의 유해까지 상하게 된다면 제자된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츠파팟---

진기를 끌어올리자 백도의 도에서 눈이 부실 듯한 광채가 뿜어지며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흑백쌍용의 흉험한 공격을 쳐내는가 싶더니 잠시 주춤한 상태에서 방향을 급작스럽게 바꾸어 열려진 창문으로 신형을 날렸다.

“……!”

흑백쌍용은 돌연한 백도의 변화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백도란 인물이 이리 쉽게 도망갈 인물이 아니라 들었던 터라 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허나 시선을 마주치는 그들의 입가에 슬며시 득의의 미소가 떠오른 것은 무슨 뜻일까?

퍼펑----!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백도의 신형이 창밖을 빠져나가자마자 가죽 북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백도의 나직한 신음소리도 동시에 들린 것 같았는데 흑백쌍용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급히 백도가 나간 창문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역시 용추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처음부터 광폭하게 몰아친다면 백도는 다른 곳으로 그들을 유인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에 대비해 조치를 취해 놓을 것이란 말도 했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허나 그들이 창문을 나서는 순간 보인 광경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가죽 북 터지는 소리에 백도가 널브러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백도의 신형은 이십여 장 밖을 달리고 있었고 그 뒤를 황급히 쫓는 두 인물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추산관 태감의 휘하에 있는 팔번 중 두 명으로 보였다. 백도는 물론 그들 역시 전혀 이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죽 북 터지는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허나 흑백쌍용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시간이 없었다. 그들 역시 백도를 뒤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도가 향하는 곳은 북쪽 생사림(生死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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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

곽정흠은 다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엽락명에게 당한 상처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도망치기는 했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엽락명은 자신만큼 이곳 운중보의 지리를 잘 아는 자였다.

도대체 그가 자신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말한 ‘그 분’이란 누구를 가리킨 것일까? 상만천일까? 아니면 추산관 태감…. 어쩌면 중의어른이 아닐까? 그의 뇌리에 복잡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흐르는 피를 일단 지혈시켰다. 깊게 패인 상처는 금창약을 뿌리고 천조각으로 동여맸다. 자신이 믿고 찾아온 그는 거처에 없었다. 이곳의 주인을 만나지 못한 이상 여기도 안전한 곳은 되지 못한다. 엽락명은 추적에도 일가견이 있어 자신의 종적을 금방 따라올 것이고, 그 역시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을지 몰랐다.

자신과 십년이 넘도록 같이 지낸 엽락명이 자신을 죽이려 든 이상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운중보에서 경비를 책임지는 자신이 운중보 내에서 죽음을 당할 뻔 했고, 또한 지금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허나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혈서에 자신의 장인을 찍을 때부터 감수하리라 생각했던 일이었다. 엽락명이 자신을 죽이려 했음은 이미 혈서의 내용이 발각되었기 때문일까?

‘알려야 한다....’

내심 생각은 굴뚝같았다. 이대로 함곡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거기에는 풍철한과 그의 형제들이 있지 않은가? 허나 그는 참았다. 자칫 미리 짐작하여 이런 몰골로 함곡을 찾아간다면 상대들에게 확실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짓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까…? 이제 몇 시진만 버티면 될 것인데….’

몇 시간만이라도 안전하게 쉴 곳이 필요했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몇 시진 운기할 곳이 필요했다. 그는 혈서 속의 동료들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대충 피를 지혈시키고 나서 요상약(療傷藥)으로 보이는 환약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견딜 수 있는 곳은 운중보 내에서 오직 한 곳이었다.

‘생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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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두 시진에 걸려 이루어졌던 회합은 끝났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상만천과 추산관 태감, 그리고 그들의 측근이 참석했던 회합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끝이 났다.

중의까지도 참석한 그곳에서 일은 결정이 되자마자 즉시 실행되었고,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이것은 정말 전쟁을 방불케 할 일이었다. 이들은 정말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왜 이들이 이리도 급박하게 정면으로 혈전을 벌이려 하는지 중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찌감치 차려놓았던 저녁인지 점심인지 모를 식탁의 음식들은 풍성했지만 아무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긴장된 모습이었고, 전쟁터에 나가 결전을 앞에 둔 병사들 같았다.

그렇다고 중의로서는 말릴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끼어들 입장도 아니었다. 분명 자신도 연관이 되어있지만 자신이 주도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회의 회주들이 나선 일이었고, 회의 결정에 자신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상만천과 추산관 태감이 결정을 내렸을 때 중의는 말리고 싶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운무소축을 잠시 후 아예 폐허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결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아직 운중을 모른다. 운중이 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아직 버릴 수 없지만 이들은 운중을 아예 도외시하고 있다. 어떤 연유로 운중이 지켜만 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만약 자신의 딸인 우슬을 건들게 된다면 참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운중이 나선다면 이곳에서 살아서 이곳을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포함해서였다.

허나 중의가 나서 말리려 했을 때 그에게 내밀어진 한 장의 혈서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었나? 이것으로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인가?

“함곡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면서 보낸 혈서입니다.”

용추는 중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차분하게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자입니다. 이름이 없이 장인만 찍어놓은 이 인물…. 중의어른께서는 알아내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중의는 한 동안 그곳에 적힌 인물들의 이름과 장인을 보았다. 이들이 그랬듯이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자신이라도 이렇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름이 없는 장인을 보며 운중보 내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손금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듯 손바닥 아래쪽에 몇 개의 금이 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면 몰라도 의원인 중의에게는 손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리한 것에 그어져 남은 상흔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의의 뇌리에는 이 장인의 주인의 영상이 떠올랐다.

“이런…? 어떻게… 이럴 수가….”

중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이미 상만천과 추산관 태감일행은 결정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모두 자리를 비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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