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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포스터.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정희성 시인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 비평사, 1991)라는 시집 속에 수록된 '유신헌법' 시에서 유신헌법을 이렇게 패러디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한다.

- 정희성 시 '유신헌법' 전문


민주공화당은 박정희의 수족 같은 정당이었다. 유신 본당이었다. 용케도 난 민주공화당이 정한 국민의 요건을 충족시켜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잃지 않았으며 이듬해 3학년으로 자동 업그레이드되었다.

밤 11시까지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이 행해졌다. 원숭이 수준을 겨우 벗어난 내 하드의 용량으론 다운 직전에 이르는 것이었지만 '너는 내 운명'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나긋나긋 5월의 훈풍이 불어오자 반 친구들의 결석이 부쩍 늘어났다. 서울의 유명한 사설학원 종합반에 다니고자 상경해 버린 것이다. 나중엔 거의 절반 정도만 출석하는 변태적인 교실 풍경이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다른 반에 비해 우리 반 애들은 크게 유별났다. 일본에서 출제된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 따위를 들고와서 쩔쩔매는 선생님을 보며 고소해하거나 선생이 보는 앞에서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좀 실력이 모자란다 싶은 선생의 수업 시간엔 아예 출석 호명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묵언 수좌'까지 있었다. 선생님들은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오기를 꺼렸다. 이런 방종스런 수업 분위기에도 모의고사 성적만은 다른 반보다 월등히 높았다. 때로는 교외에서 벌어지는 패싸움조차 우리 반의 '라이센스(license)'에 속했다.

가을로 접어들자 쓸쓸한 바깥 풍경과 학생 없는 우리 반의 교실 풍경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결코 신명날 리 없는 나날이 수북이 쌓여갔다.

어느 날 정치경제 시간이었다. 총정리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던 신지식 선생은 평소처럼 유신헌법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해 나갔다. 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선생님의 인격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난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기를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나 맹랑한 질문을 던졌다.

"1학년 때 선생님은 저희한테 한태연이 사사오입 개헌 때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자 그가 쓴 <헌법학 개론> 서문에다 '이 헌법은 무효다'라고 썼다면서 한태연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그 한태연이 지금은 유신헌법을 기초한 대가로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조차 오늘 또다시 유신헌법을 찬양하시니 대체 지식인의 양심이란 무엇인지요?"

갑자기 반 전체가 침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망연자실한 신지식 선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임아무개라는 친구가 별안간 "히히히히" 웃어 젖히는 바람에 그 깊은 침묵이 깨졌다.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순한 양 같은 신지식 선생이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임아무개가 엉거주춤 교단 앞으로 걸어나왔다. 신지식 선생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임아무개의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임아무개가 신지식 선생에게 엉겨붙은 것이다. 두 사람은 엉겨 붙은 채로 복도까지 굴러갔다. "이놈이 선생을 치네!~" 외마디 비명에 1층에서 수업 중이던 선생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올라 왔다. 그리고 임아무개를 둘러싸고 집단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하던 내가 마침내 소리질렀다.

"야, 우리 친구가 뚜드려 맞는다. 모두 나가자."

순식간에 2층 복도는 선생과 학생들이 벌이는 집단 패싸움 터가 되어버렸다. 싸움은 교장선생님이 오시고 나서야 비로소 끝났다. 곧바로 징계를 위한 교무회의가 열리고 가장 악질적인 학생 3명을 골라 퇴학 처분시키겠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그러나 정작 원인을 제공했던 나는 징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실 신지식 선생으로 말하자면 내가 볼 일이 있어 교무실에 가기라도 하면 공연히 불러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나를 귀여워 해주셨던 분이다. 다른 선생님들 역시 나를 총애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제외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졸업까지 불과 2, 3달도 안 남았는데 퇴학이라니! 어떻게든 친구들의 희생을 막아 보려고 교장선생님 면담을 신청했다. 마침 전해에 매우 정치적이던 교장이 전근 가고 새로 교장선생님이 오셨는데 아주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다. 정년퇴임을 1~2년가량 앞두고 교직의 마지막을 모교에서 보내시려고 자청해 전근 오셨다고 들었다. 나는 전에도 몇 번 교장선생님 면담을 통해서 말썽 많은 우리 반의 문제를 해결해온 바 있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은 내 면담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해 버리셨다.

할 수 없이 나를 포함한 반 대표 3인은 늦은 밤 관사로 교장 선생댁을 찾아갔다. 우리를 보자 교장선생님은 "뭐하러들 왔어. 나는 들을 이야기 없으니 차나 한 잔 들고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납덩이보다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교장 선생댁을 되돌아 나올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방안을 찾고 나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통사정 끝에 교장선생님께 3분 안에 용건을 말할 수 있는 말미를 얻었다. 지금 내가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일 게다.

"물론 친구들도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소위 '다구리'라 부르는 집단폭행에 가담한 선생님들도 이성을 잃어버린 것은 잘못이 아닐는지요? 우리 친구들을 퇴학시키시려면 선생님들께도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을 함께 물어주십시오."

교장선생님께서 약간 화를 누그러뜨리는 기미를 보이셨다. 승기를 잡았다 싶을 적에는 더 세차게 밀어붙여야 한다.

"친구들의 징계 수준을 유기정학으로 낮춰 주시면 저희도 현재의 엄청난 결석률을 한 달 안에 제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이 약속이 흐지부지되면 그땐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앞뒤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우리 반 출석률은 한 달간 거의 100%를 기록했다. 기적적인 출석률 덕분에 세 친구는 유기정학이란 비교적 가벼운 대가를 치른 후 무사히 졸업했다. 임아무개라는 친구는 지금 초일류를 지향한다는 모그룹의 상무로 있다.

역사의 반동을 경계하며

어느덧 30년도 더 지나버린 옛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요약하자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나아가서 1970년대는 '에비'의 시대였다.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인간성을 최고로 발현시키려 하기보다는 금지로써 인간을 윽박지르고 억누르던 시대였다. 박정희라는 '애비'가 자신의 가부장적 권력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기를 거부했던 '에비'의 시대였다.

이제 박정희의 시대는 말끔히 청산되었는가. 이 물음 앞에 곧장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군대 생활의 기억을 끔찍이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익힌 군대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힌 박정희 시대의 해독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엔 "자식은 애비를 닮는다"라는 말과 "인간은 자기가 속한 시대를 닮는다"라는 말은 100% 진리이다. 혹 박정희 얼굴이 생각나지 않거든 집에 가서 아버지 얼굴을 보면 될 것이다. 근엄하면서, 권위적이면서, 위선적인 면모가 있다면 '내 안의 박정희'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게 박정희는 이름을 바꾼 채 우리들의 가정생활 속에서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이것은 19세기 스페인 화가 고야의 연작 판화집 <카프리치오스(마음 내키는 대로)> 43번 작품의 제목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이성이 눈뜨고 있는 한 역사를 반동시키려는 요괴는 감히 눈뜨지 못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만으로 박정희와 유신의 잔재 청산은 끝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잔재해 있는 모순마저 청산해야 비로소 끝이다. 나쁜 구습은 그만큼 타파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신헌법#박정희#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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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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