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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떠나버린 육체는 물체에 불과한 것을…. 그 육체를 보내는 장례 과정이 살아남아 전송하는 사람들에겐 어찌나 복잡하고 번거로운지 ! 육체적으로 고역(苦役)의 기간이다.

어찌 그뿐이랴?! 육체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이 떠나는 자이든, 전송하는 자이든, 그들 모두가 겪는 정신적 고통도 만만치 않다.

지난 1월 말기 암 통보를 받고 병원에서 투병중인 여자 분이 우리 집안에 있었다. 암세포가 너무 번졌기에 수술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사들 의견과 수술을 원하는 가족들 뜻이 다르기 때문에 환자가 한동안 어정쩡한 상태로 병원에 있었다.

그 때 간병인이라는 인연으로 그녀에게 다가온 인물은 불행하게도 기독교를 머리보다는 가슴으로만 받아들인 신자였나 보다. 참으로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 간병인은 ‘죽기 직전의 병자를 안수 기도로 살려낸 적이 많다’며 소문난 기도원을 환자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그 환자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도원에 들어갔다.

‘ 안수 기도를 받으며 정성스럽게 한 달만 기도하면 병이 완쾌될 수 있다’는 기도원 측의 말은 생명 연장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심어주었다. 그녀는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가족을 포함한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단절한 가운데 먹고 잠자는 시간도 절제해가며 온 마음을 기도에 쏟아 부었다.

한 달이 훌쩍 지나 6주에 접어든 어느 날 기도원에서 보호자를 부르는 연락이 왔다. 그녀를 보고 두 아들은 깜짝 놀랐다. 통성 기도 때문에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목이 쉬어 있는 그녀는, 마른 나무처럼 피부가 뼈에 달라붙었으며, 입으로 피를 토하고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마지막 임종 상태였고, 고통이 너무 심해보였다.

하지만 목사는‘3개월만 더 기도하면 몸이 완전히 치료된다’고 장담하며 생명 연장에 집착했다. 그러면서‘무슨 일이 발생해도 기도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라 했다. 앞과 뒤가 어긋나는 해괴한 태도이었다.

두 아들은 길길이 뛰며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우선 환자가 목사의 말에 미련을 두고 기도원에 남기를 원했다. 생명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환자 자신의 뜻이 가장 중요한데 가족의 뜻만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목사와 신도들이 환자의 인권을 주장하며 병원 이송을 완강하게 가로 막았다.

가족들 안타까움은 짜증과 분노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두 아들은 ‘형무소를 갈 각오를 할 터이니 경찰서에 신고하라’며 힘으로 목사와 신도들을 밀치고 그녀를 데려와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채 5일을 넘기지 못했다.

욕망을 심어 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맹렬히 기도하는 것을 바람직한 신앙이라 지도하는 그 기도원은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존 기간을 거의 빼앗아 버려 가족들과 작별 인사조차 변변하게 나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 4월은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라는 엘리어트의‘황무지’란 시구를 절절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정신의 고통을 줄이거나 마음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원이나 교회, 성당 같은 종교적 귀의처를 찾고, 육체의 병을 고치려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 생각이련만 그 목사는 육체의 병을 없애는 전문 능력까지 고대 무당처럼 하늘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평소, ‘하나님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는 가설에 자꾸 마음이 끌렸다. 그 가설을 바탕으로 기도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고 따라서 기도하는 순간엔 하나님이 옆에 있으니 그 기도 장소가 곧 바로 교회로 변하는 것이라 추론했다. 그런 나에겐 목사 자신이 있는 곳만이 교회라 주장하며 다 죽어가는 암 환자에게 병원 침상 대신 기도원에 머무르라는 주장이 오만해 보일 뿐이었다.

목사의 어리석음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났다. 인간이 오고 가는 것은 하늘이 그 의지를 실천에 옮기는 것인데 감히 그 하늘의 뜻을 인간이 거부할 수는 없으련만 그 목사는 ‘하늘의 뜻을 거부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비이성적인 확신과 육체에 대한 그 집착이 환자에겐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고통이 되었는지.

‘ 한 달 혹은 일 년을 더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은 기간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떻게 고통없이 지낼 수 있을까에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목사가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목사와 환자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음 때문에 받는 고통은 의외로 커 보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바로 죽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가는 현상’이라고들 말한다. 사는 것 자체가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는 뜻이자 ‘일상생활’이란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죽음으로 혹은 삶으로 보인다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사는 것과 죽음이란 얼핏‘전혀 다른 두 요소’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에 경계가 없는 하나’이고 동일한 것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에 불과하겠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불이문(不二門: 둘이 아닌 문)에 들어서지 못하는 한 깨달음과 해탈(解脫)에 이르지 못한다’고 지도한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란 어둠이고 죄악이며 모진 고생길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에 ‘육체의 부활이라고 불리는 밝고 선이며 즐거움인 것을 선택, 추구해야 한다고 의식화된 사람들이 매우 흔하게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에겐 삶과 죽음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죽음을 제외한 부분만이 인생이라고 고집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 태어나서 지금까지 달려온 삶의 종점(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죽음 혹은 기독교인들의 천국)을 증오하며 도착하기를 맹렬하게 꺼려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여러 일들을 판단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매우 맹한 상태에 있어 보이는 사람이 ‘산은 산이요 물을 물이로다’라 말하는 것을 들으면 피식 웃음이 나오듯 장례를 치르는 장소에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다보니 죽음에 대해 초연해진 듯입으로는 너무도 쉽게‘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기도하면서도 막상 매장하는 순간이 오면 고통이 매우 많을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을 보고 걱정하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종교인들을 보면 ‘참, 중생답다’라는 한탄이 저절로 나온다.

내 방안에 불을 켜 두고 있으면 방밖에 새벽이 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방안의 불을 끄면 처음엔 답답해 보이지만 어둠에 서서히 익숙해지며 먼 곳의 사물들까지 보이고 나아가 밖에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금강경에 대한 지식이 가득했던 주금강(덕산 스님)에게 용담(龍潭) 스님이 촛불을 주었다. 그가 촛불을 받는 순간 혹 불어 꺼 버리자‘많이 배워 불교의 심오한 핵심을 담은 금강경 뜻에 대해 매우 많이 알고 있다’는 지식이 불이 꺼지면서 깨우침이 신 새벽처럼 다가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간략하고 예리하게 깨우침에 필요한 마지막 관문의 조건을 표현했다 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오며 습득한 지식의 불- 종교적인 지식을 포함한-을 끄기를 거부하기 마련인가 보다. 그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겪는 고통이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목이 쉴 정도로 울고 외치며 몸부림 친 그 환자의 행동을 통해 너무도 생생하고 끔찍하게 나타나 보인다!

#기도원#말기 암#삶#죽음#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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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몸담고 있는 교육현장에서 발견되는 '대중 시야로부터 가려진 여러 부분'을 대중의 관찰이 가능한 곳으로 이끌어 내어 교육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가장 강하고, 다음으로는 , 한반도 내에 오랜 세월 동안 뿌리내려온 '동서남북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운동'과 종교 사이의 이해 증진을 바탕으로 적대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개적 역할을 기자로써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어 참여를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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