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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동국대 교수.
신정아 동국대 교수. ⓒ 연합뉴스 형민우
한 젊은 큐레이터가 학력을 위조해서 교수에 임용되고 광주비엔날레 전시감독에 선임되었다가 가짜박사라는 사실이 밝혀져 큰 물의를 빚고 있다. 미술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있고, 언론은 연일 관련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 속상하다. 미술은 꼭 이럴 때만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건축물 미술장식품 관련 비리로 작가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한국미협의 선거문제나 대한민국미술대전 비리로 사회면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벌어지고 나면 미술계는 온통 부정과 부패의 온상인 것처럼 비난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일부 미술인들 때문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미술인들을 생각하며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번 일도 그렇다. 학력위조와 임용비리는 미술계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중심주의의 산물이지 않은가. 미국의 유령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대학을 비롯한 요직에 진출했다가 무더기로 발각되었다는 기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이번 사건은 대학임용비리에 얽힌 단선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관 큐레이터, 미술대학 교수,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에서 보이듯이 미술제도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구조가 신정아를 길러냈다

광주 비엔날레 재단 건물.
광주 비엔날레 재단 건물. ⓒ 광주드림 임문철
백남준은 '예술은 고등사기'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고도의 문화정치를 통해서 예술적 기호와 실천과 인식들을 공론의 장으로 쏟아내는 틀이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인정시스템'에 진입시키기 위해서 분연히 실험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아무리 고난과 역경을 강요한다고 해도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가난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백남준이 말한 예술의 장에 관한 정당한 해석일 것이다.

신정아 사건을 놓고 미술계 안팎에서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높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자성이 필요하다. 신정아 개인은 교수와 감독직의 임용이나 선정과정에 학력위조 행위가 위법한 것이었는지를 가리는 절차를 거쳐서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이다.

학위위조라는 최악의 수를 썼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지만, 신정아씨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신정아씨를 길러낸 것은 그의 욕망이기도 하겠거니와 미술계의 구조이기도 하다. 그가 이토록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미술계의 시스템이 그를 인정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술은 '인정시스템'에 의해서 작동한다. 어떤 작품이나 전시를 얼마나 폭넓은 비평적 관점 속에서 읽어내고 그것을 우리의 감성과 인식의 영역 속에서 용인하고 수용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상징투쟁을 벌이는 장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놓고 보건대 대한민국 미술의 장은 작품이나 기획·담론을 놓고 경쟁하는 곳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른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좋은 큐레이터를 길러내는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에서 큐레이터를 열망하는 낱낱의 욕망들만이 반짝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술계가 나눠 가져야 할 뼈아픈 상처이다. 그를 수석큐레이터로 길러낸 금호미술관이 있다. 짱짱하게 잘 나가다가 근 몇 년 사이에 미술인들 사이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성곡미술관도 있다. 임용공고도 없이 특채로 그를 교수직에 앉힌 동국대학교도 있다. 월간미술대상 수상자로 선정한 월간미술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있고, 하나은행도 있다. 그리고 그 끝에 광주비엔날레가 있다.

광주비엔날레가 파행을 겪는 이유

광주비엔날레가 이러한 파행을 겪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광주비엔날레를 둘러싼 미술정치는 현실정치와 너무 밀접하게 맞닿아있어서 문제다. 미술이 사회의 제반 영역과는 고립된 별개의 장이 아니라 치열한 문화정치의 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현실정치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광주비엔날레는 동시대의 치열한 예술담론을 중심으로 담론투쟁과 상징투쟁을 벌이는 장이 아니라 현실정치의 온갖 음험한 컨센서스를 재생산해내는 장이다.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선임과 취소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광주지역 미술인들과 광주지역 바깥의 미술인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희대의 희극이자 비극이다. 학력위조 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예술감독으로서의 자질을 따지지 않은 인사 관행에 있다.

만약 학력 위조문제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그냥 그렇게 넘어갔을 것이다. 차제에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사회의 파행적인 운영과정에 대해서 철저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감독선정과정에 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미국 명문 사립대를 졸업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미술을 바라보고 있고, 광주비엔날레의 현실에 어떻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느냐가 잣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그러한 원칙을 무시했다. 재단 이사회에서 꾸린 감독추천위원회의가 걸어온 갈지자 행보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렇다. 1차 회의에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평론가를 후보로 세웠다가 선정자를 내지 못했다. 2차 회의에서는 두 명의 후보를 올렸다가 한 명이 특정 조건을 내세워 거절하자 다른 후보자에게는 의사타진을 하지 않은 채 선정자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일이 다급해지자 3차 회의에서 단 한 표를 얻은 후보자를 이사장 직권으로 선정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불거져 나온 얘기들을 종합해보니 가관이다. 지역의 인사여서도 안 되고 지역을 무시하는 외부인사도 안된다는 후문이다.

로비를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이며, 광주의 인사들에게 잘 보여야 하지만 서울의 인사들에게도 낙점을 얻어야 한다. 기획자로서의 자질보다 중요한 것은 외국인 감독과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찾아낸 예술감독이라면 광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예술적 소통을 이루겠다는 건강한 사고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광주비엔날레라는 국제적 이벤트에 한몫 끼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겠다는 기획자는 많아도 광주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타 지역과 연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기획자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광주비엔날레에 광주 정신은 없다

신정아 동국대 교수의 학위가 허위라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에 훱싸인 (재)광주비엔날레는 신 교수에 대해 예술감독 선임을 철회했다. 12일 오전 한갑수 이사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형사고발 등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정아 동국대 교수의 학위가 허위라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에 훱싸인 (재)광주비엔날레는 신 교수에 대해 예술감독 선임을 철회했다. 12일 오전 한갑수 이사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형사고발 등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 광주드림 임문철
말이 난 김에 광주비엔날레에 대해 조금만 더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비엔날레는 100년 전에 만국박람회 수준의 문화교류 시스템이다. 그것은 전 세계의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놓고 경연을 펼치던 장이다. 오늘날 과연 이러한 종류의 경쟁적인 시스템이 여전히 유효한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상징투쟁의 장으로서의 예술의 장의 효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엄밀하고 정확하게 계급과 계층, 국가와 지역과 인종간의 상징투쟁이 심화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광주비엔날레가 처한 상황은 과연 광주의 정체성을 가지고 문화정치를 펼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살려서 예술적 소통의 장을 만들겠다는 것이 광주비엔날레의 정신이다. 그러나 10년을 달려온 광주비엔날레는 성장하기도 전에 이미 노회한 정치의 장으로 변질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그 어디에도 광주정신은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혹자는 광주비엔날레에서 광주를 찾는 것이 부적절하다고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그러한 시각은 오늘날 국제주의의 미망에 빠진 문화론자들의 시각이다. 예술은 국가와 지역과 계급의 영역을 벗어난 보편적인 언어라는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불과하다.

미술계는 엄연한 사회 시스템이다. 그동안 우리는 시스템 없이 욕망에 충실한 예술의 미망을 굴려왔다. 미술계는 개인의 욕망에 의해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굴절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한 개인의 거짓말도 문제이거니와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위악을 뒷받침해온 미술계의 허술한 체계에 있다. 그 체계를 바로잡으려면 아프겠지만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미술계는 그동안 바깥으로부터 많이 두들겨 맞았다. 이제는 스스로 성찰하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보는데, 혹시 이런 생각들이 그저 생각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 앞으로도 수십 년을 이 판에서 살아나갈 일을 생각하니 이 마음은 그저 바라는 마음 정도가 아니라 '간절한 소망'이라고 고쳐서 말하는 것이 좋겠다.

미술시장에 '돈돈' 돈광풍이 몰려온다

미술계 얘기 많이 했으니 이제 미술계 바깥에다가 대고 한 마디 해야겠다. 최근에 미술시장이 활성화 일로를 걷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몇 년 전까지 영화판에 돌던 돈이 이제는 미술판에 돌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리고 있다. 미술을 유동자본의 자기증식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미술시장에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돈들은 향후 몇 년 안에 현금회수를 앞두고 있는 단기 투자자금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금의 활황은 조만간 미술계를 초토화할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들린다.

문제는 미술을 사고하는 한국 사회의 천박한 수준에도 있다. 우리 사회는 미술을 통해서 사회와 마음을 들여다보는 지식활동을 기대하기보다는 시각적 취향을 충족시켜주는 액세서리로 취급하고 있다. 이른바 대중적 지지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익숙한 것, 검증받은 것, 잘 팔릴 만한 것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가.

미술은 시대를 앞서 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민사회와 함께 성장한다. 미술을 데커레이션이나 투기의 대상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때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가 놓치고 있는 진지한 성찰과 사유의 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준기 기자는 미술평론가이며 경희대 미술대학 겸임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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