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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가 방문하리라는 상만천의 전갈을 받고 소림과 무당 등의 인물들과 긴 점심식사를 끝냈다. 무겁고 침중한 분위기였지만 추태감은 그러한 분위기를 이용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어차피 생각하고 있는 대로 그들은 움직여줄 것이었다.

문제는 천과(天荂) 지공(地公)이었다. 그들은 인후(人冔)를 잃고 나서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초유의… 무엇보다 자신 셋 중에서 누군가 죽으리라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삼합회를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들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냉정한 시각과 판단력은 사라졌고, 이성은 마비되었다.

“독대(獨對)를 하고 싶습니다.”

용추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청룡각의 상황은 용추가 이미 예상했던 그 이하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감정적인 회오리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래도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인물은 추산관 태감이었다. 왜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인 모양이군.”

추태감 역시 용추가 말한 의미를 알아들었다. 천과와 지공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하게 되면 정확한 판단을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오히려 감정적인 문제에 휩쓸리게 되어 위험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추태감이 천과와 지공에게 턱짓을 했다. 나가라는 의미다.

“……!”

천과와 지공이 매섭게 용추를 노려보았다. 분명 용추가 직접 찾아왔음은 매우 중요한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다. 분노가 치솟는 때일수록 자신들이 배제되는 것에 더 큰 분노를 느끼게 된다. 불쾌하면서도 증오에 찬 시선을 잠시 용추에게 던졌던 천과와 지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포권을 위하고는 문을 나섰다.

“이것을 보시겠습니까?”

용추는 지체 없이 소매 안에서 혈서를 꺼내 추태감의 앞에 펼쳐 놓았다.

용추가 가져온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인지 짐작은 하였지만 나름대로 태연하려 했던 추태감의 눈빛이 홱 변했다. 혈서를 집어든 유난히 하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주가 함곡을 불러들이고자 보낸 목갑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또한 그 목갑은 회의 신물이 담겨 있던 목갑이었습니다.”

용추는 아직도 충격에 사로잡혀 있는 추산관 태감에게 조용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목갑 역시 함곡의 부인을 납치하면서 얻은 것이라는 점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던 추태감이 혈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결국 철담이 보관하고 있었던 회의 신물을 운중이 빼돌려 함곡에게 보냈다는 것이고, 함곡은 이것을 받고 운중보에 들어왔다는 것이군.”

“……!”

“보주와 함곡의 목적은 회의 붕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추태감이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 먹은 점심이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네가 만든 생살부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구먼….”

약간 미진한 의혹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용추는 이것이 발견되기 전 어떻게 그런 생살부를 만들 수 있었느냐는 의혹이었다. 용추가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처음… 철담어른이 시해되었다는 말을 듣고부터… 그리고 이곳에 들어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난 다음에 내린 결론은 이 모든 것을 아주 지독하게 똑똑한 인물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자네가 신태감을 죽인 흉수로 몰리면서 더욱 다급해졌겠지. 감히 천하의 용추선생을 그렇게 함정에 빠뜨릴 인물이 있다는 게 신기했겠지.”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그 사건은 용추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틀간 손발이 묶인 상태로 지내야했던 것.

“그 말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인물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결론이었겠지.”

“특히 철담어른… 그리고 혈간어른이 시해되었다는 점에서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추의 이 말에 추태감이 눈을 치켜떴다. 이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철담은… 재보가 손을 쓴 것이 아닌가?”

“혈간어른을 추태감께서 손을 쓰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처지다. 굳이 시인이나 부인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함곡과 연관을 지우는 것인가?”

용추는 이미 추태감의 반론을 예상했던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철담어른의 시해에 대해서는 상대인께서 저와 상의하지 않고 실행했습니다. 아마 사전에 저와 상의했다면 저는 반대를 했거나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

“철담어른을 시해한 자는 그 분의 제자이자 상대인의 실질적인 사위인 쇄금도 윤석진이었습니다.”

“짐작하고 있었네.”

그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라는 말투였다.

“바로 그 점입니다. 윤석진이 대단한 무위를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상대인의 배려로 이 운중보를 나설 때 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공수위가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허나 아무리 그랬다 해도 과연 윤석진 정도가 철담어른을 혼자서 완벽하게 시해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입니다.”

“진가려란 계집이 도왔다고 들었네.”

추산관 태감 역시 이 정도의 정보력이면 정말 만만치 않다. 웬만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셈이다. 용추는 속으로 잠시 긴장했다. 역시 추태감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고, 확신이 있어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상만천과 다를 바 없다.

“바란 것 이상으로 훌륭한 결과를 거두었지만 너무 쉬었다는 점에서 매우 미심쩍습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뒤집어 숙고해 보면 그런 미심적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점들은 태감께서도 느끼고 계실 줄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비영조를 시켜 혈간어른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실 때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일단 혈간어른의 발목을 잡아 놓고… 따라다니는 거추장스런 인물들 정도만 처리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정작 삼재팔번과 같은 고수들을 움직여 없애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추태감의 시선에 미세하나마 감탄의 빛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역시 용추다. 세간의 평가는 전혀 틀리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마음속에 들어와 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위험한 자이기도 하고, 얻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틀리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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