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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왕조들이 홍수 대비에 정권의 명운을 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 사람들도 오늘날 못지않게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때 사람들이 '환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환경에 대한 전통시대 동아시아 사람들의 의식은 천·지·인에 대한 관념에서 일정 정도 표출되고 있다. 환경이란 용어가 없었다고 하여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 환경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무리일 것이다.

과거의 동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에서는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며, 정부의 환경의식은 어떠했는지와 관련하여 환경사(Environmental History) 혹은 환경의 역사(History of Environment)를 전공하고 있는 명지대학교 사학과 정철웅 교수의 논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정철웅은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제2대학과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자다. 그리고 환경사란 인간 중심의 사고에 입각한 것이고, 환경의 역사란 자연 중심의 사고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오금성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해서 이준갑·구범진·박기수 교수 등의 논문을 수록한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의 환경 편에 실린 정철웅 교수의 논문은, 전통시대 중국 특히 명나라·청나라 시대의 환경문제를 종합적이고 개괄적으로 정리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황하(黃河)라는 표현 하나에서부터 전통시대 중국의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역사서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황하의 원래 이름은 그냥 하(河)였다. 그런데 삼림 파괴와 토사 유입으로 물의 색깔이 누렇게 변하자, 당나라 때부터 '황하'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빗물이 순식간에 하천으로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는 삼림이 파괴됨에 따라 황하 일대에 토사가 급증했고, 또 그로 인해 황하 유역의 홍수피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심해졌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황하 유역의 홍수피해는 명나라 및 청나라 때에 각각 454회와 480회다. 명나라(276년간)와 청나라(295년간)의 존속기간을 고려해 볼 때에, 1년에 한두 번은 중국 왕조가 황하의 홍수피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자강 유역은 황하보다도 홍수피해가 훨씬 더 심했다고 하니, 중국의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환경피해가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시대의 중국정부는 환경보호 특히 삼림보호에 적극적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위 논문에 의하면, 삼림 남벌로 인해 홍수가 빈발했다는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에, 당시의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삼림보호에 나섰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물론 중국의 역대 왕조가 삼림이나 동식물 보호를 위한 법령을 자주 공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노력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물자원 보호를 위한 법령도 여러 차례 공포되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이것도 현저하게 느슨해졌다고 한다.

그럼, 심각한 환경문제를 안고 있었던 중국 왕조들이 정작 환경보호에는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철웅은 명청시대에 만연했던 '발전 위주' 다시 말해 '개발 위주'의 관념이 그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을 하였다.

명청시대의 중국역사에서 드러나는 현저한 특징 중 하나는 이 시대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서양 근세 못지않게 이 시대의 중국에서도 경제개발을 위한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 학계가 명청시대의 사회경제실태로부터 자본주의 맹아를 이끌어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명청시대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중국경제가 비약적으로 개발된 시기다.

이처럼 개발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한 당시의 중국 왕조로서는 자원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데에만 우선적 관심을 기울였을 뿐, 그 자원을 보호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환경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게 정철웅의 추론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중국 왕조가 자원개발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는 점은, 18세기 초반 청나라의 섬서성 관료들이 농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물설치 사업을 강행하려 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수자원 개발을 위해 관 주도 하에 우물을 설치하려 하자, 농민들이 "무분별한 우물 개발은 지역의 풍수를 해친다"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국가의 난개발에 대해 국민들이 집단적 저항을 표출한 셈이다.

물론 청나라 때의 민간인들이 호림비(護林碑)를 세우고 또 황실에서 황실 사냥터의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등의 노력을 벌인 기록은 있지만, 당시의 중국정부는 환경보호보다는 경제개발에 보다 더 주안점을 둔 것이 사실이다. 명청시대의 비약적인 도시·인구·수공업·상업 발달이 그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정철웅의 논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명청시대의 중국정부는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개발 위주의 경제정책 때문에 환경보호를 등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해마다 여러 차례 황하나 양자강의 홍수피해를 경험한 중국 왕조도 삼림보호의 필요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당장 경제개발을 추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삼림보호를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명청시대의 상황을 본다면, 국가가 환경보호에 적극적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에 본질적인 수정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개발 위주의 경제정책을 고수하는 한, 아무리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국가가 환경의 보호자가 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과 환경을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정책을 수립할 때에만, 국가가 적극적인 환경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중국인#중국#환경의식#정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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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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