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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들 또 오는군."

유도거는 화살을 매만지며 서서히 밀려오는 거란군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노(弩 : 쇠뇌)를 장전하던 김달치도 여유 있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흥화진성을 공격하던 거란군은 수차례를 반복해 공격을 가해왔으나 대부분은 성벽 가까이도 오지 못한 채 화살에 맞아 폐주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고려군은 들어라! 너희들의 총대장 강조는 이미 우리들의 손에 목이 떨어진지 오래다! 어찌 이 손바닥만한 성안에서 어리석은 저항을 하고 있는가!"

초전의 승리로 방심한 고려의 총사령관 강조가 거란군의 기습을 받아 사로잡혀 죽고 고려군 3만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흥화진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흥화진을 지키는 도순검사(고려 시대에 지방에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아치) 양규는 강조가 가지고 있던 병부의 도장을 찍어 거란군이 위조한 항복문서를 무시했고 뒤이어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항복을 권하러 온 노전과 마수를 잡아놓고 항복하지 않았다. 화가 난 거란군은 흥화진을 공격해 왔으나 헛되이 병사만 잃을 뿐이었다.

"그대들이 귀순해 온다면 높은 벼슬과 은전을 내릴 터이니 주저하지 말고 성문을 열어라!"

유도거는 콧방귀를 끼었다.

"저 놈들이 하다하다 안 되니 쓸데없는 소리만 해대는구먼."

거란군은 성을 포위한 채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다가 해가지자 슬며시 물러났다. 고려군도 경계하는 병사들을 남겨둔 채 저녁을 먹으며 휴식을 가졌다. 잡곡밥을 고봉 째 올린 커다란 나무그릇에 반찬은 소금에 절인 무와 된장이 전부였지만 병사들은 이를 달게 먹었다. 유도거와 김달치는 동쪽 성문 앞에 자리를 깔고서는 게걸스럽게 두 그릇째 밥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통주에서 전령이다!"

밥을 먹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섰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슬쩍 열린 성문 사이로 말을 탄 전령이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지친 표정으로 들어섰다.

“이보시오. 보고도 좋지만 어서 밥부터 자시오.”

“밥부터 자시고 가시오.”

병사들이 식사를 권하며 전령을 잡아두려는 이유는 밖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고 싶어서였다. 전령은 손을 흔들며 그런 애써 그런 요구를 물리쳤다.

“있다가 돌아와서 먹겠소. 장군께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있다오.”

병사들은 전령에게 길을 터주며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얼마 후 돌아온 전령의 앞에는 산더미 같이 쌓인 밥과 절인 무, 된장에 이곳에서는 매우 귀한 날계란 하나까지 놓여 있었다. 거란군을 피해서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둘러 오느라 허기가 졌던 전령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얹히겠소. 물도 드셔가며 자시오.”

전령의 밥그릇이 거의 비어갈 때 쯤 병사들은 전령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모여 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 없는 전령이라도 그들이 뭘 요구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지금 곽주성이 거란족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오는 길이외다.”

“곽주?”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거란군이 흥화진을 두고 남쪽의 곽주성부터 점령한 것은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곧바로 개경으로 내려가겠다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주에서는 대체 어찌하였기에 거란놈들에게 패한 것이오?”

전령은 먹던 밥숟갈을 늘어트린 채 눈물을 훔쳤다.

“내 평생 그렇게 비참한 광경은 처음 봤소이다. 통주에서 우리는 거란군과 크게 싸워 두 번을 내리 이겼습니다. 자연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는데 거란놈들이 우리의 진법을 역이용해 기습해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본영부터 박살이 나고 말았지요.”

“어찌하였기에 진 안쪽에 있는 본영부터 공격당한단 말이오?”

병사들이 물어보자 전령은 옆에 놓아두었던 날계란을 깨서 입에 털어 넣은 후에 줄줄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연재소설#결전#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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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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