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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보주가 보냈다고 하면서 다른 인물이…. 아니 혈서에 서명한 인물이겠군. 그 인물이 그것을 보내온 것이란 말인가?"

"그런 셈이지.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네. 나는 육 개월 전에 정말 의외의 인물로부터 연락을 받았네. 그의 제의는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달콤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네. 물론 그의 진심인지조차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회의 붕괴 말인가?"

"동림당의 복수와 이 나라의 꺼져가는 운명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함곡이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끝까지 그를 믿을 수 없었네. 그는 나에게 보의 신물 뿐 아니라 이 일을 추진하고 있는 인물들의 서약을 증표하기 위하여 혈서를 보내주겠다고 했네. 그럼에도 반신반의 했지만 모종의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나는 그를 믿게 되었네. 그리고 그것을 보내는 순간 나는 운중보로 들어온 것이지."

"좌총관이 자네를 데리러 갔다고 하지 않았나?"

"나중에 목갑을 가져온 사람은 진운청이었네."

"좌총관과 진운청도 자네와 한 패이겠군."

풍철한이 신음처럼 말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

"물론이네. 혈서에 서명한 인물들은 모두 열 명이네."

갑자기 풍철한의 뇌리 속에 많은 인물들의 영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열 명의 인물들 그리고 보주가 아니라면 함곡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누구일까? 허나 풍철한은 가슴속에서 스멀거리며 피어나는 궁금증을 일단 덮어 두기로 했다.

만약 굳이 밝히려 하지 않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함곡에게 추궁하게 되면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함곡이 끝까지 자신에게 숨기려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헌데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까지 포함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이 나라의 국운은 경각에 달려있네. 동북(東北)의 외세는 이미 북경의 코 앞에 닥쳐있고 안으로는 위충현의 권세가 이미 황상의 그것을 넘어섰지. 곳곳에서 흉흉한 민심은 이미 잦은 폭동으로 이어지고 곧 대규모 민란이라도 일어날 기세네."

"국운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인가?"

"위충현의 가장 충실한 심복인 추산관 태감은 역모를 꿈꾸고 있네. 이제 허수아비로 앉혀놓고 있는 황상까지도 귀찮다는 것이지. 이미 그들은 수많은 의인(義人)과 동림당원들을 대부분 살해했네. 동창뿐만이 아니네. 그런 패악과 역모는 회를 통해 은밀하게 이루어졌네. 이제 그들을 막을 사람은 없지."

"으음."

신음이 절로 나왔다.

"또한 상만천까지 역모의 야심을 가지고 있네. 용추라는 인물을 얻은 것도 그러한 것에 대한 포석이지. 또한 상만천이 과거에 내게 제의했던 유혹적인 조건을 거절한 이유도 거기에 있네. 그는 단지 상계를 휘어잡고 만족할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지."

"그들은 같은 회 소속이 아닌가?"

"왜 아니겠나? 회에 존재하는 세 명의 회주, 이미 살해된 철담어른을 제외하면 남은 두 명의 회주지. 팽팽하게 저울추를 잡고 있던 철담 어른이 죽자 이제는 회를 혼자 장악하기 위하여 두 사람 간 알력이 심해졌지. 이제 한계에 이르렀네."

"…."

"회를 장악하는 사람이 천하를 장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 그 생각은 절대 틀린 것은 아니네. 보주의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는 그래서 아주 민감하고 첨예한 문제이고 그들이 다른 일을 모두 제쳐두고 이 운중보에 들어올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네."

"자네 역시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해 들어오게끔 만들었을 것이고."

풍철한이 다른 사람들 틈에서 슬쩍 빠져나가려는 함곡의 소매를 잡은 셈이었다. 함곡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일종의 시인이었다.

"신태감을 그래서 살해한 것인가? 부득이 추태감이 운중보로 직접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더구나 신태감의 살해용의자로 자네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존재인 용추를 지목하게 만들면서 용추의 발을 꽁꽁 묶어 두었군. 정말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군. 그저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것만 단순히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까지 달성했으니 말이네."

"너무 비웃지는 말게. 자네라도 그런 것쯤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네."

풍철한의 뇌리에는 이제야 전체적인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중원을 암중에서 장악하고 있었던 회의 존재는 단순하지 않았고, 더구나 중원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실권자와 상계를 지배하는 중원제일부(中原第一富)를 제거하려는 엄청난 사건이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아니 누군가가 그 시기까지 만들어왔을지 모르지만 이 운중보 안에서 모든 것을 결말지려 하는 것이다. 추태감과 상만천의 야심을 적절히 이용해 끌어들여서 말이다.

"자네의 목적은 물어볼 필요가 없게 되었군. 이 안에서 모두 죽이려 하는 것이겠지."

"물론이네. 나의 바람은, 아니 우리의 바람은 바로 그것이네. 회주가 모두 사라진 회는 일시적으로 무용지물이 될테니까. 또 그들이 역모를 위한 반석으로 사용하려던 회는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마땅하지."

"회는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닐 터인데…. 중원 각지에 그리고 어느 곳이나 회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 있지 않은가? 단순히 회주들을 죽인다 해서 회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또 다른 회주가 나타나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것은 자네가 아직 회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네. 회의 조직과 구성은 매우 은밀하고 같은 회의 인물이라도 결코 많은 사람을 알 수 없도록 되어있네. 물론 자네 말대로 회주가 사라진다고 회가 완전하게 붕괴되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회주가 모두 일제히 사라지게 되면 회는 일시적으로 마비될 것이네. 또한 회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도 회의 운영에 반대하는 인물들도 있다고 들었네. 그 후에 중간 주요 인물들의 연결고리를 끊어 나간다면 지금까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회와는 아주 다른 미약한 조직으로 변하게 될 것이네."

그런 정도를 생각하지 않고 실행에 옮길 함곡이 아니다. 풍철한은 이제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을 슬슬 끄집어냈다.

"철담 어른을 시해한 자가 누군가? 정말 보주인가? 아니지. 자네와 손을 잡은 인물이 보주는 아니라고 했으니…. 성곤어른인가? 아니면 회운사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철담어른의 제자인 백도인가?"

"많이 생각했군."

함곡은 풍철한의 따지듯 묻는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아니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미 죽은 윤석진이지. 바로 철담어른의 제자이자 상만천의 사위인 윤석진이란 말이네."

"정말인가? 그가 사부를 시해한 패륜아란 말인가? 그는 이미 죽었는데… 그럼?"

풍철한은 놀랐다. 허나 되묻다가 뇌리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을 하다말고 눈을 치켜뜨며 함곡을 바라보았다.

"윤석진! 그렇다면 윤석진과 진가려는 자네, 아니 자네와 같이 하겠다는 혈서의 주인들이 죽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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