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당장이라도 부친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간청하는 것이옵니다.”

왕은 너털웃음을 지은 후에 밖에 대기하고 있는 비장을 불렀다.

“좋은 말 한필을 골라 이리로 가지고 오너라.”

“전하! 전하의 하해(河海 : 강과 바다)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연실 고개를 조아리는 고도에게 왕이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너를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 가기 전에 노래나 한 곡조 뽑고 가거라.”

고도는 자리에서 일어서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 가락을 뽑아내었다.

-사비성 너른 들에 / 논두 많구 밭두 많다/ 씨 뿌리고 모 욍겨서 /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 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 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허면 / 구룡포에 버렸으니 / 슬프구나 어와 벗님 / 구국충성 다 못했네 / 에헤에헤야 헤헤 /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노래를 마친 고도는 왕 앞에서 정중히 예를 차려 다시 한 번 감사함을 표현한 다음 밖에 대기시켜 놓은 말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왕과 좌평들은 고도가 부른 애절한 노래의 여운에 젖어 말없이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남부여 진지의 외곽에서는 다소 느슨한 태도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나면 자넨 뭘 할 텐가?”

“고향 바닷가에서 살진 돔을 낚아 탁주 한 사발과 함께 즐길 터이니 자네들도 오게나.”

“허! 그거 참 좋겠군. 그런데 저기서 뭔가 오는 것 같지 않은가?”

밤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횃불이 없으면 사방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귀에는 무엇인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들려오고 있었다.

“관산성에서 온 우리 병사거나 매복에서 돌아오는 이들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 횃불하나 없이 수많은 인마가 조용히 다가오자 보초병중 하나가 옆에 꽂아둔 횃불을 들고 다가가 보았다.

“어디서 오시는 길…앗!”

순식간에 횃불을 든 병사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놀란 병사들은 벌떡 일어서 달려가 보았다.

“저건 신라군이다! 신라군이 나타났다!”

병사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소리와 함께 남부여군의 진지 안으로 들어온 신라군의 지휘관이 크게 소리쳤다.

“모두 쳐라! 불살라 버려라!”

우레와 같은 외침 소리와 함께 함산성 주위가 횃불로 가득 둘러싸였다. 신라군은 은밀히 함산성을 포위한 후 기병들을 태연히 안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었다.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남부여군은 신라기병의 말발굽에 밟히고 창칼에 찍혀 쓰러져 갔다. 무너진 성벽을 넘어 밖으로 도망가는 남부여군에게는 성을 포위한 신라군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어디서 신라군이 나타난 것이냐?”

왕이 밖으로 나와 외쳤지만 허둥대는 좌평들은 물론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원인을 알기보다는 우선 급한 불을 끄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왕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를 자꾸 따져 묻지 않고 병사들을 진정시킬 것을 좌평들에게 명했다.

“폐하! 어서 성밖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적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장수 하나가 달려와 왕 앞에 엎드리며 재촉하자 좌평들은 튼튼한 말 한필을 데리고 와서는 왕을 억지로 올려 태워 보낸 후 무예가 출중한 비장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했다.

“우리가 여기서 죽더라도 폐하가 여기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처 말도 타지 못한 좌평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 십 명의 병사들과 함께 칼을 굳게 잡고 신라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함 소리와 함께 신라군의 기병이 사납게 달려들어 왔다.

“말의 다리를 베어라!”

창을 든 병사가 없이 칼로서만 기병을 대적하면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지만 노련한 신라 기병은 그 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좌평들을 둘러싼 채 빙글빙글 돌며 활을 쏘아 대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결전#최항기#연재소설#남부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