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는 조선 태종의 스승인 원천석과 관련이 있다. 원천석의 본관은 원주이고 원주 원씨 중시조이다. 호는 운곡(耘谷), 고려말 학자로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 한 때는 이방원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고려 말 정사가 문란해지자 시국을 개탄하며 고향인 후치악산(안흥쪽) 강림천변으로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어 세 번째 임금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옛 스승인 운곡을 중용하려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1400년,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일이었다.
여러 번 불렀으나 그 때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忠臣不事二君)'하여 거절하고, 왕자의 난에 실망한 나머지 "내가 제자를 잘못 가르쳤다"며 한탄을 했다.
하루는 태종이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치악산으로 찾아갔으나, 왕의 행차를 미리 안 그는 아예 깊은 산골짜기로 몸을 숨겨버렸다. 운곡이 살던 집에서 7일 동안 머무르며 올 때를 기다렸으나 스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 태종이 머물렀던 곳이 치악산 주필대(駐蹕臺)이며, 후에 태종대(太宗臺)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소식이 없자 집을 지키고 있던 노파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아들에게는 기천현감을 제수했다. 태종이 한양으로 돌아가며 스승을 향해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는 산이 향배산(向拜山), 수레를 타고 넘은 곳이 수레넘이 고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태종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진본 청구영언>
눈을 흠뻑 맞고 휘어진 대나무를 누가 굽었다고 하는가?
쉽게 굽을 대나무의 절개라면 눈 속에 푸를 소냐,
아무리 생각해도 눈 속에 변하지 않는 절개를 가진 것은 저 푸른 대나무뿐인가 한다.
이 시조를 대나무에 비겨서 자신의 굽힘 없는 절개를 당당히 나타내고 있다.
태종대 누각에 앉아 강림천변을 내려다본다. '왕자의 난'으로 형제간 피비린내를 풍기며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지만 산속까지 찾아와 군사부일체를 실천한 태종과 한 치의 불의도 용서할 수 없었던 운곡의 절개 앞에 나그네 마음도 애틋하기 그지없다.
태종대 앞을 흐르는 강림천은 지금도 그 옛날처럼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방원아, 날 찾아봐라'하는 운곡 스승의 숨바꼭질 소리가 6백년이 지난 오늘도 계곡 속에서 들려올 것만 같다.
맑고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강림천을 뒤로하고 태종대를 떠나려는 데 마침 조팝나무 한 무더기 붉게 피어나 여름 한낮을 뜨겁게 달궈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원주쪽 치악산을 전치악산, 안흥쪽 치악산을 후 치악산이라 한다. 태종대는 후치악산 강림천변에 있다. 원주-안흥-강림 411번 지방도로- 강림초등학교-후치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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