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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 여성관이 어떤지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로마인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시오노 나나미가 적어도 로마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영웅 중심의 관점'과 '남성 중심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에서 여성에 대한 업적을 찾는 것이 거의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이 여성의 존재는 근대, 아니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졌다. 과거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로마의 역사를 재구성한 시오노 나나미 역시 한정된 남성 중심의 기록을 토대로 <로마인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오노 나나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마의 여성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우리에게 전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평범했다. 남성들이 보기에는 '평범'할지 모르지만 여성의 시각으로 본다면 '편협'하다는 표현이 적당할지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야기하는 <로마인이야기>에는 90% 이상이 남성의 이야기이다. 나머지 10%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관계된 남성이 얼마나 뛰어날 수 있었는가, 아니면 얼마나 모자란 인물이 될 수 있는 가에 대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권력의 중심에 서다

로마제국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남성들 사이에 유난히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당당하게 로마의 최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정략결혼까지도 불사할 정도로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로마 사회에서 황제(클라우디우스)의 아내이자, 황제(네로)의 어머니가 되어 실질적으로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한 소(小) 아그리피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로마 역사에도 권력자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정치를 하기로 작심한 여자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중략) 자기가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는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통치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제7권, 413쪽)

문장의 뉘앙스는 그다지 좋은 평가가 아닌 듯하다. '여자가 감히 정치를…'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여성의 지위를 가지고 감히 이런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로마의 상황을 감안해볼 때 상당히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의심을 받고 있는 게르마니쿠스와 대(大) 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딸로, 제3대 황제 칼리쿨라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아내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다가, 아들이 황제가 되면 황제의 어머니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혈통적으로 숙부에 해당하는 황제와의 결혼에 적극성을 보였다.

여성으로서 권력의 중심부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편이나 자식이 권력의 중심에 오를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남편이나 자식이 뛰어나지 못하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어려운 방법이다. 아그리피나로서는 남편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아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12세밖에 안된 아들이 성공하는 것을 기다릴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약간 변칙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 로마의 일인자인 황제와 결혼하는 것이었고, 이어서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양자로 입양시켜서 훗날 황제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아그리피나는 혈통적으로 숙부에 해당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재혼하는 데 성공하며 로마의 일인자의 아내가 된다. 황제의 아내가 된 아그리피나는 자신을 '아우구스타'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초대 황제가 수여받은 명칭 '아우구스투스'의 여성형인 아우구스타의 지위를 얻은 그녀는 실질적으로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 성공한 아그리피나는 곧바로 두 번째 단계에 착수했다. 자신의 친아들인 12세의 도미티우스를 황제의 양자로 입양시켰고, 세네카와 부루스로 하여금 제왕교육을 시키며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이어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서기 54년 가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63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임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 아그리피나의 아들 도미티우스가 16세 10개월의 나이로 로마의 제6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유명한 '네로' 황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에 아그리피나가 개입했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진실은 안개처럼 희미해졌고, 확실하게 드러난 현상은 아그리피나의 두 번째 목표(아들의 황제 등극)도 무사히 성취된 것이다.

황제의 아내로서 황제와 함께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한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황제가 되자 황제의 어머니로서 더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싶어 했다. 당시에 네로와 아그리피나의 얼굴을 새긴 화폐가 유통될 정도로 아그리피나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 아그리피나의 한계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황제가 된 지 1년 만에 모든 영향력을 상실해 버렸다. 이것은 네로 스스로가 어머니에게서 독립을 원하기도 했지만, 네로의 주변 인물들 또한 아그리피나의 행동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인 로마는 아그리피나의 튀는 행동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아그리피나가 아들 네로와 사이가 안 좋아진 이유는 네로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아크네, 포퐈이아) 때문이었다. 노예였던 아크네와 이미 남편이 있는 포퐈이아에 대한 네로의 비정상적인 사랑은 아그리피나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가 자신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고마워하고 순종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20세가 넘어가는 피 끓는 청년인 네로는 어머니에게 억눌린 감정을 반항으로 표출시켰다.

네로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어머니의 절대적인 도움에 의해서 황제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로가 아그리피나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주변의 도움, 그것도 아그리피나가 네로에게 후견인으로 붙여주었던 세네카와 부루스의 도움이 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아그리피나는 비록 정치적인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드러내는 능동적인 여성이었다. 노골적으로 군단의 호의를 받으려고 노력했고, 네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연결고리였던 옥타비아(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와의 이혼문제에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헌신과 희생을 동반하는 기나긴 양육의 과정을 통해서 네로를 키운 것이 아니라, 정략결혼이라는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서 빠르게 권력의 중심부에 오르고, 자식을 로마의 일인자로 만든 아그리피나의 불행은 '그토록 믿었던 아들이 더 이상 자신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보낸 암살단에 의해서 무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로마는 황제의 어머니가 무참하게 살해되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분수도 모르고(?) 최고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아그리피나에 대한 로마 사회의 평가였다.

아그리피나의 실패 원인은 우선적으로 로마가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로마는 아그리피나에게 최고의 권력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아그리피나는 그것을 유지하고 되찾기 위해서는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다. <로마인이야기> 제7권의 중반에 등장한 아그리피나의 이야기는 간헐적으로 네로 황제의 업적에 의해서 잘려지고 중단되기를 반복하다가 496페이지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로마의 지도자들이 혼자가 아니라 주변 인물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던 것을 생각해볼 때, 아그리피나는 실로 외로운 혼자만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진출이 제약받는 상황에서 정당한 경쟁이 아니라 변칙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얻었지만, 그 방법만으로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과 좌절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서 그려진 그녀의 모습은 야망은 있지만 사회적인 한계와 함께 개인적인 한계도 있었다고 묘사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이혼하려는 네로에게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시오노 나나미는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지 23년 뒤에 태어난 네로의 시대에는 황제에게 '피'보다 '실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제7권, 493쪽).

그런데 무엇보다도 아그리피나의 한계는 변칙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아들을 황제로까지 만들었지만, 정작 아들이 어머니와의 공동 통치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그녀가 자신들을 죽이러 온 병사들을 향해서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죽이려면 네로가 들어있던 여기를 찌르라"고 절규한 아그리피나의 목소리는 후대의 역사가들을 통해서 독특한 이야기의 소재로 오르내리고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낳고 길러 성공시킨 남성에 대한 배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만약 아그리피나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태어났더라면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녀가 칼리쿨라의 여동생이었으니, 칼리쿨라의 남동생이 되었을 것이고, 칼리쿨라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칼리쿨라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인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역사가들이 한결같이 칭찬하고 있는 '개방성'과 '포용성'은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인 한계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패배한 적을 아군으로 흡수하는 아량은 있었지만, 인류의 절반인 여성에게는 거의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단지 여성으로서 '성공'이라함은 남편이나 자식의 성공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뿐이지 그것을 같이 누리려는 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쉽게 허용할 수 없는 금기였던 것이다. 그러한 금기에 홀로 외롭게 저항하고 싸운 아그리피나의 좌절은 이후 로마를 포함한 온 인류가 20세기에 도달할 때까지 풀지 못한 과제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응모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이야기, #아그리피나,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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