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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시집 <구석>
정윤천 시집 <구석> ⓒ 실천문학사
읽다가 자꾸 책을 덮고 고개를 들게 만드는 시집이 있다. 책을 덮는다고 시가 난해다다거나 복잡하다는 뜻이 아니다. 시가 읽는 이의 느낌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정윤천의 시집 <구석>은 자꾸 고개를 들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마당가에서 읽다가 구름을 쳐다봐야 할 것 같고, 숲 그늘에 앉아 읽다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시집을 학교 창가에 앉아 읽었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공을 차느라 땡볕 속을 달려가고 있고, 자기에게 공을 달라는 소리가 낡은 창을 타고 들려온다.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그런 풍경 또한 이 시집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가 오래된 풍경 속의 모습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풍경을 그려 보여주면서 그의 시는 잊혀진 날들을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다가 자꾸 고개를 들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 한 번쯤은 이야기하고 갔으면 싶어지네.

어느 수수롭던 바람의 길 모서리쯤이던가, 어쩌다 토란잎 우산과도 닮았던, 푸릇한 일순이 불쑥 떠올라주거나 흔들리기도 했던 날이 있었다네.

그게 어디 우산이었겠느냐만, 어깨도 벌써 다 젖어버리고 이마에 찬 빗방울도 토닥였던 것이었지만, 토란잎 우산과도 같았던 것들이여, 그것들은 어쩌면 우리들이 이후로도 오래 견디며 살아가야 할 찌푸린 세월의 저쪽에다 치받아보았을, 그 중에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을, 한 잎의 까마득한 그리움일 수도 있었다네.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 모두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는 커다란 파초가 한 그루 있었다. 추운 강원도라 겨울을 날 수 없었던 파초는, 가을이 되자마자 거처를 사랑방 구석으로 옮겼고, 너무 자란 윗부분은 잘려나가곤 했다. 그래도 봄이면 다시 마당가에 나와 새 잎을 틔우곤 했는데, 잎이 어찌나 넓게 자랐는지, 여름날 비가 쏟아질 때면 나는 자주 파초 아래에서 비를 긋곤 했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았던 그 기억을, 나는 이 시를 읽다 떠올렸다.

토란을 심지 않던 우리 시골에서는 토란잎 우산이 없었으니, 내게는 이 시의 토란잎 우산 같은 것이 파초 잎 우산이었던 셈이다. 파초 잎이 토란잎으로 바뀌었을 뿐, 이 시가 그려내는 풍경은 나의 어린 날 기억의 한 장면 그대로다. 그러니 시의 마지막 '까마득한 그리움'은 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이기도 하다.

그 그리움이 시를 읽다가 자꾸 고개를 들게 했다. 내가 고개 들어 바라보는 허공 어디에, 아스라이 스러져버린 어린 날이 그리움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내가 살아가야할 '찌푸린 세월'을 아프지 않게 만들어주는 싱싱한 '토란잎 우산' 아니 '파초 잎 우산'이리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억을 가진 사람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을 기다려본 기억이 없는 사람의 인생의 무늬에는 어딘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생의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 모든 생의 그 그늘들은 다른 방식으로 스러지기도 할 것 같았다.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등에 대고서라도. 이제라도 '그'를 한번 기다리며 서 있어보라고, 가만히 말을 건네주고 싶었던 가을날이 있었다.
-<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모두


이 시도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그리움 역시 기억 속의 그리움이다. 은사시나무 그늘이 좋은 우체국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이 시의 밑거름이다. 그 기억 속의 '기다림'은 그러나 단지 기억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의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있다고 시인은 속삭이고 있으니 말이다. 기다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의 생에 기다림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그래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과는 삶의 무늬가 조금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다림은 어느 한 순간의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되는 배경 같은 것이라고, 이 시는 잔잔한 목소리로 시를 읽는 사람에게 들려준다.

온갖 난해한 말들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읽는 이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요즘 시들 속에서, 정윤천의 시를 읽는 것은 더없이 아늑하고 아득하다. 그 아늑함과 아득함은 그의 시가 서정적 목소리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지나가버린 어느 한 순간의 그림이 추억처럼 담겨 있다. 혹은 우리네 이웃 사람들의 삶이 맛깔 나는 전라도 사투리와 가락으로 담겨 있다.

그래서 <구석>을 읽으면서 자꾸 숨을 고르게 된다. 시를 읽으며 숨을 고르는 것은, 읽는 이가 시 속으로 들어갈 문을 수없이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이며, 작가와 독자의 행복한 공감 나누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정윤천 시인이 펼쳐놓은 그 아득한 그리움 속으로 들어가, 생의 한 <구석>에 자신을 가만 놓아두고 보는 날 하루쯤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시는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구석

정윤천 지음, 실천문학사(2007)


#정윤천#구석#시집#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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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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