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설중행이 짤막하게 그 뒤에 벌어졌던 인후와 남궁정 간의 비무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는 것이 그것은 시작과 함께 끝났기 때문에 덧붙일 말도 없었다.

"남궁정이라…. 남궁가에서 괴물을 하나 키워냈군. 하기야 언제까지 상만천에게 눌려 지낼 삼합회가 아니지."

백도의 중얼거림에 설중행은 신기한 듯 백도를 주시했다. 누가 보더라도 백도는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헌데 그의 말을 들어보면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설중행은 백도를 응시하면서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거기에는 왜 갔었소?"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슨 뜻인지 모를 막연한 질문. 찻물을 다기에 부은 후 다기를 닦듯 처음 찻물을 씻어버리던 백도가 얼굴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치켜 떠 설중행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세한 미소가 스치는 것 같았다.

또르르---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다기에 물을 넣고는 잔에 따라 하나를 설중행 앞으로 밀었다.

"궁가 계집이 정말 너를 사랑하는 모양이구나. 그리 일렀는데도 네게 입을 연 것을 보니."

백도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면서 아주 쉽게 시인했다. 하여간 여자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여자란 때로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에 목을 매달기 때문이다. 여자의 입이란 마치 때가 되면 벌어지지 못해 안달이 난 석류와도 같아서 비밀을 가슴에 담고 있지 않는다. 특히 남의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너무나 뜻밖이었소. 누군가 사제(師弟)를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고 동조하고 있었다니 말이오."

심각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또한 추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백도가 쉽게 시인했듯이 설중행도 남의 이야기하듯 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욱 많지. 하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서…그 내막을 알고…그 상황에 처해 있다면 대부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항상 역지사지 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역지사지란 백도의 말대로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고 상대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감정까지도 이해할 때 완전한 역지사지가 되는 것이다.

"쇄금도가 반드시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들리는구려."

'죽여야 할 이유'가 아니라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이라고 말했다. 말이란 이렇게 다르다. 이러한 표현 역시 백도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윤석진이 죽임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것이 아니냐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이유야 어쨌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상대의 감정을 정면으로 건드는 일은 금물이다. 백도는 문득 시선을 돌려 사부의 위패가 놓여진 상청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할 두 가지 패륜(悖倫)을 저질렀지."

설중행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백도의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패륜?"

허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려하자 일단 백도가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차나 마셔."

백도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의 태도로 보아 뭔가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여유를 갖자는 의미인 것 같았다.

-----------

"함곡이야…함곡… 자네가 우려하던…. 그리고 예상하던 그 인물이었던 거야."

상만천은 이제야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힌 듯 차분하게 말을 흘렸다. 모든 것이 이제 드러나고 있었다. 운중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혈서에 기재된 열명과 함곡의 작품이다.

"…!"

용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추측하지 못할, 그리고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미궁 속을 헤매게 할 인물은 함곡 뿐이었다. 허나 상만천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명백한 그 증거가 나타나자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장인(掌印)의 주인은 누굴까?"

상만천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지만 분명 용추에게 묻는 말이었다.

"예외적으로 유독 손바닥이 두툼하고 큰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몸집에 비례하는 법입니다."

비슷한 크기도 있었지만 다른 장인들보다는 약간 크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여기에 적혀있는 다른 인물들의 수뇌이고, 이 일을 꾸민 장본인이 분명하다. 이것을 함곡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함곡과 이미 치밀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자네는 알게 모르게 함곡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왔지? 누군가? 함곡과 최근 접촉을 가진 인물 말이야."

"특이할 인물은 없었습니다. 삼 개월 전 성곤어른이 한 번 함곡의 거처를 다녀갔었고, 함곡이 아내와 함께 지난달 거처를 떠나 사흘간 이곳 항주에서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달에 이곳 항주에? 그 때 만난 자는?"

"의심될만한 자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좀 더 신중하고 치밀하게 함곡을 감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함곡은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감시하는 자들도 소홀해지기 마련. 함곡이 지난달에 항주에 온 것은 분명 이런 일을 계획하기 위한 발걸음이었으리라.

"성곤… 성곤이라…"

성곤은 몸집이 큰 사람이다.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중의라면 이 장인을 보고 누군지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사실을 어찌해야 할까? 추산관 태감과 공유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 단독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일까?

허나 여기에 기재된 이름 면면히 가볍게 볼 자가 없다. 하나하나씩 제거해 나간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미 자신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주시할 상대를 생각하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몰라도 지금 데리고 들어온 이군과 오위만으로 처리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삼합회 역시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터. 일접사충이 살아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목이 사라지자 너무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성곤 어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주는? 비껴나가는 것인가?"

심증만 가득할 뿐 증거는 없다. 물론 보주가 직접 혈서에 기재된 인물들에게 지시했다면 더욱 혐의는 짙어지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서한 '그 자'는 누구의 권유에 의해 혈명(血名)을 썼는지 보고한 적이 없다.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만천은 의자에 몸을 더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그 자'를 불러 확실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신의 눈에 발견된 이상 이제는 자신이 칼자루를 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하늘이 자신의 원대한 위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