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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전사로 사망한 네팔인 이주노동자 겅가 람 쿠워.
감전사로 사망한 네팔인 이주노동자 겅가 람 쿠워.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아버지가 이주노동을 떠난 나라는 먼 곳입니다. 생이별로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남겨진 가족들은 궁금하고 걱정스럽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위안 삼아 각자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서로를 이어주는 핏줄의 힘 말고는, 가족의 생계를 도맡은 아버지가 부쳐주는 돈 말고는, 가족을 지탱하는 일상적 유대라는 게 없어져 버립니다.

10년이 넘도록 한국 땅에서 일했던 겅가 람 쿠워(네팔·사진)씨는 어느 비 오는 여름날 감전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는 아버지가 보인 매정한 뒷모습을 원망하던 딸이,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만큼의 긴 세월, 가족이 함께 꾸었던 오랜 꿈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자녀를 교육시키고 돌아와 단란히 살겠다는 소박한 꿈을 앗아간 찰나의 감전사고, 그 후에야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단하고 신산한 삶에 무심했던 지난날을 아프게 후회합니다.

훌쩍 자라는 자녀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와 사진 속의 모습 말고는 되새길 추억이 없는 자녀들이 보낸 이산의 시간은, 이제 생활의 감옥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보다 현실의 무게가 더 막막한 삶의 가운데에서야 이전에는 몰랐던 사무치는 그리움이 고개를 듭니다. 떠나는 아버지에게 매달려 눈물바람 하던 가슴 아픈 기억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큰딸은, 아버지의 추억이 없는 동생들에게 미안하기만 합니다. 여기, 그 가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택시에 매달린 네 살짜리 막내도 떼놓고 떠난 길

엄마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우유를 짭니다. 우유를 통에 담아 배달까지 하고 나야 일이 끝납니다. 그 사이 저는 아침밥을 해서 동생들 먹이고 학교에 보냅니다. 가끔 새벽부터 고생하시는 엄마가 가여워 그만 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생계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탓에 매일 아침 소젖을 짜고, 우유를 팔아야 우리 가족이 먹고살기 때문입니다. 그리 큰돈을 버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에겐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일하러 가신 것은 1996년,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그때 저는 열 살이었고, 남동생은 네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엄마 뱃속에는 막내동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10년 동안 어렵고 힘들었지만, 저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동생들도 의젓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나시던 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 품에 안겼던 네 살짜리 동생도 아버지가 타신 택시 창문을 붙잡고, 데리고 가라고 울던 일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울며불며 매달리는데도 택시를 타고 떠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참으로 매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정작 제가 어른이 되어 그때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해되지만요.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아버지는 열여덟 살 때부터 히말라야 근처에 있는 시멘트공장에서 일하셨다고 합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아버지에게 시멘트공장 일자리는 아주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당잡이로 일을 했는데, 몇 년을 성실히 일해서 정식 직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망자의 영정을 안고 있는 유족들. 좌로부터 큰아들, 딸, 부인, 남동생.
망자의 영정을 안고 있는 유족들. 좌로부터 큰아들, 딸, 부인, 남동생.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아버지는 저와 어린 동생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배워야 한다고, 내 힘닿는 만큼 밀어줄 테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동생은 몰라도 저는 그 말씀을 가슴에 깊이 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외국으로 일하러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브로커를 통해 일본에 가려고 시골의 땅을 많이 팔아 돈을 줬다가 사기만 당하고 결국 일본행을 포기하셔야만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을 가게 되셨지요. 시골에 남은 땅을 마저 팔아서 말입니다. 한국에 갔다 오면 그때 판 땅보다 더 큰 땅을 사고, 좋은 집도 짓고, 셋이나 되는 자식들 원 없이 공부시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지금도 삼촌은 그 일만 생각하면 울화가 터진다고 합니다. 그 땅만 안 팔았어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라면서요.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저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욕먹을 일을 하셨는지 몰라도 저는 그 말이 싫습니다.

비 오던 날, 외롭고 쓸쓸하게 삶을 마친 아버지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고 하는데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아버지가 안 오더랍니다. 나가봤더니 아버지는 이미 감전사고로 돌아가신 뒤였다고 합니다. 7월, 한국은 비가 많이 내리는 때라고 하더군요. 그날도 비가 내렸고, 장대 같은 비에 전기가 흘러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아버지는 자주 일하는 공장을 바꿨고, 우리는 몇 번 물어보다가 자주 바뀌니까 묻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무관심했던 일이 모두 후회스러웠습니다. 평소에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버지께 여쭈어보고 관심을 좀 더 가졌더라면 아버지의 죽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를 잃고 우리 가족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린 자식들 걱정으로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자식들만큼은 원하는 대로 공부를 시켜주겠노라 생각하셨을 텐데,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가 어머니는 두려우셨을 겁니다. 아버지처럼 또다시 우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말입니다.

보상금을 받아 지은 겅가 람 쿠워 가족의 집 외부 광경.
보상금을 받아 지은 겅가 람 쿠워 가족의 집 외부 광경.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어떻게 나온 돈인지 몰라도 보상금이 얼마 왔습니다. 처음에는 이 돈 대신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아버지가 없는데 이런 돈 따위가 뭐가 필요하냐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셔도 남은 식구들은 먹어야 했고, 공부도 해야 했고, 또 전처럼 살아야만 했으니까요. 보상금이라도 받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 싫었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 보상금으로 할머니 이름으로 된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할머니와 작은아버지, 그리고 우리는 집에서 받은 월세를 나눠서 쓰고 있지만, 공부하는 아이들이 셋씩이나 되는 우리에게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욱 소 키우고 우유를 파는 일에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저와 동생은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내가 살아있는 한 막내도 대학에 보내야 할 텐데, 내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구나"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머니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꺼칠했던 수염,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큰동생은 이미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잊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타신 차를 붙잡고 데려가라고 울었던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막내동생은 그저 상상 속의 아버지만을 그리워합니다.

그런 동생들을 보면 한없이 안쓰럽고, 나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추억이라는 것이 때론 사람을 슬프게도 하지만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인데, 동생들에겐 아버지에 대한 슬픈 추억조차도 없으니 말입니다. 사진 속에서만 웃고 있는 아버지가 동생들에겐 아마도 너무 멀고 낯설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이주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송환

이주노동자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자의 고국에 연락하여 가족을 찾는다. 때로는 이 일조차 쉽지 않아 가족이 사망소식을 한참 뒤에나 듣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사망소식을 알리고, 가족이 한국에 입국하여 장례 및 기타 절차를 직접 할 것인지 의사를 확인한다.

그러나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 예를 들면 가족이 감당하기 힘든 왕복 항공료와 체류비 때문에 한국에 직접 오지 못하고 인권단체나 친인척에게 장례 절차를 위임하는 편이다. 전화선을 타고 가족의 오열이 흘러 넘친다.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장례비를 걱정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변 친구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한다. 병원비를 모두 계산하지 않으면 병원에서 시신을 인도받을 수 없으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을뿐더러 매일 안치료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큰 금액이 되곤 한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시신을 본국에 송환할 것인가 한국에서 화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망인이 시신 화장을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 출신인 경우에는 시신을 송환하는 경우가 많고, 화장이 일반적인 불교나 가톨릭 출신인 경우에는 한국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송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매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덧붙이는 글 | * 2006년 7월 23일에서 10월 5일까지 총 열두 가족의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묶은 작은 책 <꿈 그리고 악몽>이 지난 겨울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중 여덟 가족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는 사망자 가족 지원을 위한 후원과 연대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소중히 모아주신 정성은 사망자 가족의 생계를 돕고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쓰입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665901-01-326055 이란주(아시아인권문화연대) 

* 후원금을 보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신 당신이 궁금합니다. 후원금을 입금하신 분들은 asiansori@empal.com이나 032 684-0244, 0245로 꼭 연락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주노동자#네팔#아시아인권문화연대#꿈 그리고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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