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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과 군주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극심한 천재지변에 시달려야 했다. 을유년과 병술년의 가뭄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민란 일보 직전이었다. 전국의 농토는 불볕으로 타들어 갔고 태종 이방원의 가슴은 재가 됐다. 특히 풍해도와 동북면의 기근이 극심했다. 동북면의 기근을 구휼하기 위하여 전라도의 양곡을 수송하던 조운선이 난파되어 43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계림과 합천에 지진이 일어나는가 하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7, 8월에 우박이 쏟아졌다. 태백성은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이르는 말로서 샛별, 개밥바라기, 장경성(長庚星)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천문기상학으로 해석하면 기상이변이고 천재지변이지만 당시에는 하늘의 노여움으로 받아들였다. 기상대에 해당하는 서운관이 하늘을 관측했지만 뾰쪽한 대책이 없었다. 밤을 새워 하늘을 관측한 서운관승(書雲觀丞) 박염이 보고했다.

박염(朴恬)은 일식을 잘못 관측했다 하여 경상도 동래에 귀양 갔다 유배가 풀려 되돌아온 서운관원이었다. 당시 일식은 서운관의 주 관측대상이었다. 서운관이 일식의 시일을 예측하면 임금은 각사의 당상관과 낭관을 거느리고 월대에 정좌하여 해와 달이 완전해질 때까지 기도드렸다. 해와 달의 이상변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시일을 잘못 관측하여 임금을 헛수고하게 하였으니 귀양을 가게 된 것이었다.

"밤에 금성이 목성을 범(犯)하였고 유성이 태미동번(大微東藩) 상장(上將)에서 나와 고루(庫樓)로 들어갔는데 크기가 됫박(升)만 하고 그 빛이 청황(靑黃)이었습니다."

"유성은 어떠한 별인가?"

"병거(兵車)를 맡은 곳입니다."

"그러면 그 응험(應驗)은 어떠한가?"

"유성이 크면 사신(使臣)이 크고 유성이 작으면 사신이 작은 것이오니 명나라 사신이 오리라 생각되옵니다."

이것이 당시의 천문기상학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약주(藥酒)를 끊었다. 순금사 옥을 비롯한 전국의 형옥에 갇혀 있던 죄인들 중에서 참형 이하의 죄수를 용서하여 석방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는 것은 오직 과인이 우매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벌을 행함에 밝지 못하고 사람을 씀에 적당함을 잃고 궁금(宮禁) 안에서의 복어(服御)가 제도에 지나쳐서 재변(災變)을 부른 것이 아닌가 염려되니 마땅히 각각 직언(直言)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내 그것을 고치겠다." - <태종실록>

스스로 채찍질하며 몸가짐을 단정히 했으나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았다.

"지금 한재(旱災)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가뭄을 구(救)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들이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말하여 각기 흉년을 구제할 방법을 아뢰라."

사헌부 장령 김여지가 방법을 내놓았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백악(白岳), 목멱(木覓), 남교(南郊), 북교(北郊)에 벌써 비를 빌었으니 지금은 마땅히 종묘(宗廟) 사직(社稷)과 토룡(土龍)에 비를 빌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예전부터 가뭄과 큰물의 재앙은 다 임금이 덕이 없어 이르는 것인데 지금 중과 무당을 모아서 비를 빌게 하니 부끄럽지 않느냐? 나는 비를 비는 제사는 그만두고 사람의 일을 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도 경서를 약간 읽어서 중이나 무당의 속이고 허망함을 아는데 이제 도리어 요술을 빙자하여 하늘이 비를 내려주기를 바라서야 되겠느냐." - <태종실록>

"이는 비록 옛 성왕의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 신에게 모두 제사지내는 것 역시 예전부터 내려온 일입니다. 지금 중들이 이미 모였고 준비도 다 되었으니 풍속에 따라서 행하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불교를 혁파하고 있는데 중들을 모아 제사지낸다는 것은 이율배반이었다. 태조 이방원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갈등이 생겼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은 비록 영전(令典)이 아닐지라도 공구수성(恐懼修省)하는 뜻을 보이고자 함이니 마땅히 중외(中外)로 하여금 정하게 제사를 마련하도록 힘쓰게 해야 한다."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하늘에 빌어보자

김여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극심한 가뭄에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으니 군왕으로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선 종묘사직과 토룡(土龍)에 정결하게 제물을 드리고 동남(童男)을 모아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를 행하게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데 하늘이 움직이지 않았다. 비를 뿌리지 않은 하늘을 원망하던 백성들의 분노의 눈초리가 임금에게 옮겨졌다. 폭발 직전이었다.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자 천둥을 부르는 태일초례(太一醮禮)를 행하고 백악산 성황당 신에게 녹봉을 내렸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참소(讒訴)가 행하는가? 백성들이 원한이 있는가? 어찌하여 하늘의 꾸지람이 이처럼 심한가?"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통했을까? 기우제의 영험이 통했을까? 지나가는 비가 뿌리더니만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벼락의 희생자가 속출했다. 현풍에서 엄대라는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고 개경에서는 건이라는 여자가 벼락에 희생되었다. 관내에서 제일 많은 희생자를 낸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박은이 보고했다.

"완산 사람 부개가 벼락 맞아 죽었고 남원 사람 부존이 죽었으며 광주 사람 득만과 득귀 형제가 죽었습니다. 또한 이들 형제가 끌고 가던 소도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벼락(雷震)이 사람에게 치는 것은 무슨 이치인지 내 아직 모르겠다."

"세상에서 벼락을 '천벌(天伐)'이라 합니다. 사람의 죄악이 차고 넘치면 하늘이 이를 내리치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서운관원이 대답했다. 책임전가가 아니다. 당시 천문학의 앎이다. 오늘날의 과학문명시대에는 초등학교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의 최고 천문학자라는 선운관원들도 벼락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길거리에 나붙은 대자보

나라에서 강하게 몰아붙이는 불교 개혁에 밀리던 불교계가 마냥 밀리지만은 않았다.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극심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한 것을 기회로 삼았다. 종루(鍾樓)와 운종가(雲從街)에 익명서가 나붙었다. 오늘날의 대자보다.

"가뭄은 하륜이 집정한 소치다."

어느 시대 어느 때나 반대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하륜이 총대를 메고 불교를 강하게 밀어붙이자 불교 승려들은 물론 조정에도 반대세력이 있었다. 공격 대상이 된 하륜이 임금에게 정승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사직하는 전(箋)문의 언사는 지극히 절실하여 실로 가상하다. 재이(災異)가 옴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다. 오늘날 비가 오지 아니함은 죄가 실로 내게 있지 어찌 정승에게 있겠는가? 유언비어로 남을 비방하는 것 따위는 내 진실로 믿지 않는다. 굳이 사임하지 말고 나의 다스림을 보필토록 하라."

하륜의 사직을 물리치고 좌정승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소격전(昭格殿)에 비 내리기를 빌게 하였다. 사직을 청하는 하륜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후에도 전국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냈으나 결국 비는 오지 않았다.

#천문#태극성#서운관#장경성#태미동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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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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