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까이 본 비파
가까이 본 비파 ⓒ 홍광석
먼저 비파나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원산지는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주로 자라는 상록 관엽수. 키는 10m쯤 자라고 잎은 넓으면서 갸름하게 긴 타원형으로 연한 잎을 가지고 차를 만들기도 한다. 11월쯤 작고 하얀 꽃을 피우며 꽃에는 엷은 향기가 있으며, 살구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는 이듬해 6월 초순에 황금색으로 익는데, 마치 포도처럼 송이를 이룬다. 잘 익은 열매는 과즙이 많으며 달다. 그리고 간혹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기도 한다(과문한 탓인지 중국과 한국의 옛 시나 산문에서 비파를 소재로 삼은 글은 찾지 못했다).

내가 이국적인 비파나무를 처음 만난 것은 30년 전 완도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현관 입구에 심어진 나무는 보리를 벨 무렵이면 아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군것질 감이 흔하지 않던 시절 먹음직하게 보이는 비파열매의 유혹을 아이들이 뿌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먹지 말라는 학교장의 훈화도 소용이 없었다. 숙직교사가 숨어서 지키기도 했지만 한 눈 파는 사이에 손닿는 곳의 덜 익은 열매까지 사라지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교사들도 아이들에게 질세라 사다리를 놓고 합법적(?)으로 남은 비파 열매를 훑었다. 노란 열매의 껍질을 벗기면 부드러운 속살도 노랬다. 한 입 베어 물면 과육은 입안에서 녹고 맛과 향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교사들은 그런 비파를 먹으며 감시를 피해 비파나무를 넘보던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콩알 같은 씨를 챙겼던 기억도 있지만 그 학교를 떠난 후 비파나무를 잊었다.

올해도 열린 비파나무의 황금색 열매

열매와 잎을 중간쯤 잡은 그림
열매와 잎을 중간쯤 잡은 그림 ⓒ 홍광석
마당의 비파나무 전경
마당의 비파나무 전경 ⓒ 홍광석
다시 비파나무를 만난 것은 어떤 동양화가의 전시장에서였다. 시원하게 그려진 비파 잎을 알아본 순간 시골 학교 현관 앞에 심어진 나무를 떠올리며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따뜻한 기후에서 자란다는 비파나무가 광주에서 자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또 종자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전세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가난한 내 형편으로서는 비파나무를 심을 마당이 없었다.

우연히 목포에 갔다가 비파나무를 발견하고 비파나무 아래 씨가 떨어져 자란 작은 묘목을 흙에 싸안고 왔지만 마당이 있는 집을 사기 전까지 비파나무는 화분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면 실내에 들여놓고 애지중지 키웠지만 좁은 화분에서 시달리던 나무는 고작 두 그루만 살아남았다.

지금 마당에 자라는 비파나무는 1988년, 현재 사는 곳으로 이사한 후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하면서 모험하는 심정으로 심었던 두 그루 중의 하나다. 첫해에 다소 부대끼던 나무는 키가 커지면서 의외로 잘 자랐다(한 그루는 앞집으로 분양하여 한참 잘 자랐는데 집 주인이 바뀌면서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다). 나무가 어른 키를 넘으면서 열매도 맺기 시작했다. 걸쭉한 푸른 잎도 특이했지만 초여름 황금색 열매는 이웃들에게 진기한 구경 거리였다.

올해도 비파나무에 황금색 열매가 열렸다. 싱싱한 잎과 품위 있는 나무의 모습도 좋지만 푸른 잎과 어울린 노란 열매는 더 아름답다. 이웃들이 들락거리며 열매를 맛보며 나무를 칭찬이라도 하는 날이면 나무에 대한 아내의 설명이 자못 길어진다.

완도에서 먹었던 열매 맛 느낄 수 없어 아쉬워

비파 씨앗
비파 씨앗 ⓒ 홍광석
그러나 나에게는 말 못할 아쉬운 점이 있다. '강남의 유자가 강북에는 탱자'라는 말이 맞는 것인지 옛날 완도에서 먹었던 열매의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열매의 살집이 두텁지 못하고 단 맛도 덜한 이유는 완도와 다른 기후 조건 때문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종자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굳이 싫은 나무가 따로 있을 것인가? 비파나무는 나에게는 열매를 서리하려는 아이들과 숨바꼭질했던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비파나무는 계절을 거슬러 추운 날에 피는 귀여운 하얀 꽃과 초여름의 황금색 열매, 사계절 넓고 푸른 잎, 더위를 식혀주는 짙은 그늘, 아름다운 수형을 갖춘 좋은 점이 많은 나무다. 그리고 잎과 열매에 여러 가지 약리적인 효능이 있다니 잎으로 차를 만들고 열매로 술을 담그면 여러 벗들과 뜻 깊은 자리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많은 사람이 비파나무를 좋아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오는 일요일(17일)에는 광촌리 아내의 '뜨락' 한쪽에 비파 씨앗을 뿌리리라. 그리하여 묘목이 자라면 산자락 울타리에 비파나무 숲길을 조성할 작정이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비파나무를 알아보고 푸른 그늘에 앉아 잠시 쉴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때는 비파 열매에 눈길을 주는 아이만 있어도 한 움큼 따서 가슴에 안기리라.
#비파나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개인의 잔잔한 기록도 역사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봄 길 밝히는 등불, 수선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