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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한 시사 주간지는 일본 소설에 점령당한 한국 소설 시장의 현재 모습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이런 일본 소설 현상은 새삼스러운 일도,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일본 소설의 한국 소설 시장 장악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것도 아니고 다른 매체에서도 이미 많이 다뤘다. 다만 그 기획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있었다. 비평의 부실이 소설의 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례사 비평'의 난무가 한국소설의 위기에 일조하고, 일본 소설의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아쉬운 것은 용감하게 평단에 문장의 칼날을 날린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2002)>나, 여기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비평집단을 또 하나의 권력집단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맞고도 틀린 일이다.

당연히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으니, 문제점 있는 소설이 양산될 수 있다. 소설의 질이 낮아 지고, 일본 소설의 점령 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문제 많은 소설은 독자들이 외면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지적해 줄 작업과 작업을 수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비평 혹은 평론이 존재하는 이유다.

주례사 비평이 한국 소설을 망친다는 기사가 포털에 뜨고 나서 한 블로거의 기사도 한 포털의 메인을 장식했다. 요지는 한국에 비평가가 없다는 내용. 아예 비평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근본적 규정이다. 그것은 실제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비평가다운 비평가가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그런데 세상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듯이 말하는 비평가들이 주례사 비평의 폐해를 모를까. 그렇다면 알고도 행한다는 말인가. 그럼 더욱 못된 녀석들 아닌가.

여기에서 한 가지 물을 수밖에 없다. 소설가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문학적 가치일까? 글쎄다 싶은데, 아무래도 대중적 인기와 주목을 빠트릴 수 없다. 그래야 수입이 얼마간 들어오니 말이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대중적 인기?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문학적 가치인가. 어림도 없다.

비평가는 역설적으로 욕을 먹고 산다. 이제 문학 시장. 소설 시장이라고 부르지만 비평 시장은 없다. 즉, 비평은 수요가 없다. 창작자건 출판사건 쓴 소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 월간지나 계간지는 말할 것도 없다. 진보적인 매체, 보수적인 매체의 공통점 모두 비평의 시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평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재밌는 잡문이다. 시장이 없다면, 공공 무문에서 먹고살 것을 얼마간 지원해줄 법도 하다. 하지만 창작자에 대한 관심도 없는 마당에 평론에 밥숟갈 놓아주기 힘들다.

물론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비평가들이 있다. 이들은 비단 문학평론가만이 아니라 영화평론가에 많다. 여기에 대중문화평론가도 한구석 차지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인기 있는 작품을 찬양하거나 의미를 부풀려주는 작업을 한다. 무엇보다 매체에서는 이들에게 비평을 시키지 않고 찬양과 율동을 부탁한다. 이에 충실하지 않은 비평가들은 곧 잘린다. 창작자는 키우지만, 비평가는 1회용이다. 언제 외면당할지 몰라 매체의 논리에 순응해 간다. 비정규직, 가장 최전선에 있다. 창작자가 선두에 있다면, 그 앞에 비평가가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비평가의 실체가 있는 것일까?

평론가는 있지만 독자적 평론 매체는 없다

비평가 집단은 언제나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항상 일정하게 존재하는 듯이 매체를 장식한다. 그러나 문학 평론이나 영화를 평론하는 이들은 있지만, 그들의 독자적 매체는 없다. 밥이 힘인데, 밥그릇이 없다. 영향력 있는 문학, 영화 잡지는 그들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렇듯이 평소에는 그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관심이 없다. 그러다 논란이 될 만한 작품이 나오면 비평가 집단이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싸움이 있는 듯 매체는 호들갑을 떤다. 비평가는 이때 작가를 돋보이기 위한 1회용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곧 실체가 없음이 드러난다.

아직도 비평의 큰 시장중 하나는 대학이다. 대학교수를 바라보고 비평을 한다. 물론 불문율이 있다. 무협지나 환타지, 인터넷 소설 그리고 칙릿과 같은 잡쓰레기(?) 소설은 절대 비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비평해보았자, 교수되기 힘들다. 또한 애용되는 일정한 개념이나 분석틀을 사용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다. 여기에 학위제도는 강력하게 사고의 틀을 걸러 버린다.

이러한 재생 방식은 문단의 내로라하는 계간지나 월간지를 중심으로 그 기본 틀이 절대 바뀌지 않을 듯싶다. 아무리 젊은 비평가들을 편집위원으로 임명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인 이유다. 대학에서 이미 걸러지고 등단 제도에서 이미 걸러진 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부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대중과의 유리는 당연해진다. 그러한 기성 체제와 관계없이 활동하는 이들은 극소수다. 이들에게는 몇 중고(重苦)가 가해진다. 소설가의 배고픔은 문학적 가치로 찬양된다. 비평가의 배고픔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전혀. 배곯아가면서 추위와 병마에 견디며 쓴 비평가의 이야기는 기사거리도 안 된다. 비평가는 강자, 그리고 창작자는 약자의 위치에 오르기 쉽다. 그러나 비평가는 역사에 남지 않으나 창작가는 남는다. 비평가가 부와 명예를 얻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소설 아니 소설을 포함해서 문화 장르의 발전을 염려한다면, 주례사 비평 자체에 대한 공격은 실익이 없다. 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위기 아닌 적이 없다. 거꾸로 비평가가 제대로 있어본 적도 없으니, 소설의 위기가 적어도 비평가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닌 것인가. 분명한 점은 주례사 비평의 고질병에 비평가들의 안일한 태도가 문제의 소치다.

하지만 문단에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글을 받아줄 매체가 대한민국에는 많지 않다. 이는 문학만이 아니라 영상, 영화, 드라마에도 마찬가지다. 문화권력과 강단파에 속하지 않은 다양한 비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매체가 보장된다면, 정말 비평의 창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 창궐덕에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보낸 글입니다.


#비평#문학평론#학위제도#주례사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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